'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던 날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와 미군들을 거리에서 종종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때는 그들에 대해 막연한 편견, 낯설음, 이질감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었는지.. 당시엔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디어 - 영화나 드라마, 언론매체 등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사람을 보는 입장이기만 했던 나는, 약 20년 뒤 그 때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봐왔던 것들을 뼈아프게 반성했다.
한국에서는 고액 과외 선생님, 캐나다에서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엄마의 오랜 친구, 그리고 그 분의 남동생 부부가 토론토에 이민을 가 계셨는데 연락이 닿고 닿아 많은 도움을 주셨다. 동생과 내가 지낼 곳도 수소문해 알아봐주셨고, 현지 네트워크를 통해 주말동안 한인마트에서 시식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일자리도 구해주셨다.
2012년, 스물네살이었던 나. 나는 그때까지 '힘든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음... 하나 있다. 수능이 끝나고 용돈을 벌고 싶어서 시작했던 나의 첫 직업. 내 첫 아르바이트는 한과 공장에서 한과를 만들고, 포장하는 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주말마다 8시간 내내 서서 흩날리는 엿가루를 온 몸으로 받으며 포장을 하고, 허리를 굽혀 두 팔을 사정없이 휘저으며 쌀과자를 찐득한 조청에 버무리던 일. 딱 들어봐도 몸쓰는 일이라 힘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세상 편한 꿀알바, '과외'를 주로 했다. 용돈을 벌고 등록금에 보태기 위해 대학생 시절 내내 과외를 달고 살았다. 시간당 벌이가 꽤 괜찮았던 나는, 먼 이국땅 캐나다에서 그간 내가 얼마나 '아름답게 일해왔는지'를 온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캐나다의 대도시 토론토에는 한인 마트가 여럿 있다. 그 중 '갤@리아'는 규모가 꽤 크다. 우리나라의 E마트급.
그 때의 서러움과, 분노와... 그런 것들을 쓰자니 벌써부터 화가 나고 울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곳에서 약 두달 반 정도 일했고, 짤렸다. 이유는 매출이 너무 낮다는 것. 안 팔리는 것들만 시식하게 하면서 사장은 종종 나를 사무실로 불러 매출에 대한 압박을 무섭게 가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는 항상 눈치가 보여서 내가 시식하던 제품들을 하나씩 사들고 집에 갔다. 참고로, 캐나다에서는 노동법상 3개월 이상 근무하면 마음대로 짜를 수 없다. 딱 3개월이 되기 전, 주말에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 때 그들을 캐나다 정부기관에 찌르지 않았을까' 이불킥을 열번 스무번도 넘게 하게 된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현금으로만 페이를 지불한 것. 고용 계약서를 단 한 장 조차 쓰지 않았던 것. 더워서 앞머리를 핀으로 꼽아 올렸는데, 관리자가 이게 뭐냐며 핀을 잡고 흔들며 조롱한 것.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때의 그들이 아직까지도 유학 떠나 부족한 용돈을 벌러 온 혹은 워킹홀리데이를 떠나온 동포들에게 그렇게 대우하는지는... 나는 그 때, 이민사회의 한국인들에 정말 많이 실망했고 상처받았다.
3개월 동안의 어학원 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력서(레쥬메)는 학원을 다니는 동안 준비했다. 선생님들이 꼼꼼하게 봐 준 덕분에 완성까지는 수월했다. 문제는 정말로 일을 구하는 것. 구인구직 사이트를 하루에도 몇 번씩 체크하며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내고, 다운타운을 쏘다니며 'Hiring'이 붙은 곳에 이력서를 직접 제출했다. 운이 좋으면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볼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적은 없었다. 약 100통 정도를 뿌리고 나니 대여섯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까
그때 내가 주로 했었던 고민 또는 생각은 그랬다. 내 영어가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3개월 동안, 어학원에서 꽤 높은 레벨의 수업을 듣다보니 영어 말하기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 일상 생활을 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소통할 수 있었고,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 나름 깊게 토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면접을 보러 간 곳에서, 면접 끝에 그들이 주로 하는 말은 "by the way, I'm concerned about your speaking." 덤으로, 위 아래로 내 전신을 훑는 건 기본이었다.
애초에 사무직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라면 수월했을 카페 스태프, 레스토랑 서버 면접에서 몇 번씩 엎어지니 정말 서러웠다. 면접은 잘 보았느냐는 학원 선생님에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so sorry... but It's not your fault."
맞다. 내 잘못이 아닌데, 그땐 모든 게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몰랐을, 내가 겪은 '차별'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의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 팀홀튼(Tim Hortons)에 카페 스태프로 잡을 구했다. 그곳은 이미 고용된 나보다 한 살 많은 한국인 언니가 있었고, 대체적으로 나보다 조금 어린 필리핀 출신의 대학생들이 스태프로 구성되어 있었다.
토론토 대학교 근처 지점인 팀홀튼. 매니저도 좋았고, 성향이 몇몇 갈리긴 했지만 스태프도 모두 좋았다. 단 하나, 사장빼고. 그녀의 경험상 한국인은 대체적으로 손이 빨랐고, 러쉬아워 시간에 샌드위치를 만들게 하기에 아주 좋았다. 손이 빠른 나는 보통 오전 타임(7시 - 15시)에 근무했고, 주식이 빵인 수많은 캐나다인을 위해 베이글과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팀홀튼에서는 여러 스태프가 돌아가면서 파트를 맡는다. 일정 시간 카운터를 보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음식 재료를 준비한다. 그런데 나한테만 거의 오직 샌드위치 파트에만 배정해놓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침 샌드위치 러쉬를 끝내고 참다참다 따지면, "If you speak English better, I'll get you on a counter for sure. Cheer up, Bella!" 이러고 앉아있었다. -_-
그리고 손님들. 나의 빅 스마일을 좋아하는 단골 신사 손님, 버터를 정말 좋아하고 나를 항상 스위티로 부르던 할머니 등 친절한 손님들도 정말 많았지만, 처음 겪는 인종차별에 정말 정말 정말 힘들었다. 가뭄에 콩 나듯 카운터를 보다가 영어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해 쩔쩔매자, 그는 매니저에게 내가 무려 '세 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만들었다며 울그락불그락 소리높여 화를 냈다. 혹은, 샌드위치 메뉴 이름을 부르며 메뉴를 주문한 손님을 찾는 나를 보며, 내 발음을 블라블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며 깔깔대던 손님도 있었다.
국적이 달라도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것
캐나다, 특히 토론토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 그래서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좀 덜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시선과 표정, 태도는 곳곳에,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런데, 그래도, 사람이 주는 상처는 또 사람이 치유해주더라. 캐나다인 이웃을 사귀고 싶었던 동생과 나는, 어느 날 콘도 피트니스 센터에서 따뜻한 표정의 노부부를 만났다.
텅 빈 그 곳에서, 누군가 오는 사람이 없나~ 기웃기웃 설렁설렁 운동을 하던 동생과 나는, 수영을 하러 온 그들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정말 정말, 감사하고 사랑하는 Peter와 Pat. 그들은 흔쾌히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등 관심있게 이것저것 물어봐주었다. 떠듬떠듬, 우리는 한국에서 왔고, 이 콘도의 몇층에 살고, 영어를 배우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 학원을 다니고 일을 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바로 다음 날, 함께 식사를 하자며 우리를 초대했다.
We think of you
and your sweet sister often.
Peter 부부가 나와 동생에게 베풀었던 친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종종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함이 충만해진다. 꼭 다시 만날 거라며 토론토 공항에서 헤어진 뒤 벌써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때 느꼈던 고마운 감정들은 아직도 선명하다. 가끔, 미디어에서 캐나다와 관련된 컨텐츠를 접하면 페이스북을 키고 Peter와 Pat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면 그들도 기꺼이 화답해준다. 정말로 친절한 사람들. 나의 멋진 친구들.
푸른 눈의 캐나다인, 그들과 소통했던 값진 나날들
7개월 정도의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내 인생의 다시 없을 Holiday.
그 이야기들을 담느라 욕심을 냈더니 2탄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그동안 계속해서 이 글을 서랍에서 꺼내어 썼다가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는데, 이제는 마무리 짓고 또 다른 이야기를 써야겠다.
아팠던 경험도, 기뻤던 경험도, 지나고 나면 모두 소중하다. 차별을 겪어보니 차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외로움을 겪어보니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된 것 같다. 캐나다에서의 경험 뿐만 아니라, 내 인생 모든 순간을 통해 비뚤어지지 않고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힘 내, 나 자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