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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Mar 26. 2021

아메리칸 드림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나에게는 철 없던 고등학생 때부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꿈이 있었다. 아니 목표라는 편이 좋겠다. Rich Handsome Chinese 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겠다는. 심지어 그 목표는 거의 이뤄질 뻔 했다. 위 조건에 Young 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아! 냉정해지자. 핸섬은 아니었다. 


상대는 영국 유학 때 만난 세 살 연하의 중국 남자 아이. 매일 꽃이며 먹을거리며 스스럼 없는 애정표현까지, 연하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던 아이. 시작도 해보지 못한 관계지만 만약 그대로 영국에 남아 석사과정을 마쳤다면 어땠을지 가끔 상상해 본다. 지금의 남편은 부자도 중국인도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2년이나마 미국에서 살게 해주었으니 2% 정도는 목표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외국 생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자유로움, 늘 새로운 짜릿함,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기대.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예민한 사람인 나에게 외국 생활은 잘 맞는 선택지였고, 세 차례의 짧은 외국 생활은 기대만큼 잘 맞았다.


 




첫 타국 생활은 중국이었다. 늘 내 발목을 잡던 영어보다는 조금 더 경쟁력이 있을 듯해 택한 중국어. 공인 중국어시험 성적은 무조건 잘 받아야 했다. 졸업을 목전에 둔 대학생이니 면접에서 영어는 기본이지만 중국어는 잘 합니다 할 정도로는 스피킹 실력도 키워야 했다. 천진대학교 어학원에는 다행히 한국 학생들보다 태국, 독일 등 외국 학생이 더 많았다. 교수님 소개로 천진대학교에 다니는 푸다오(선생님)도 구했고, 방송국에 다니는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열악한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중국인 가족 2대가 살고 있는 집에 방을 구했다. 자연스럽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어를 사용해야 했던 7개월. 아직 쌩쌩 돌아가던 20대 초반의 내 머리는 공부하고, 생활하고, 놀며 언어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원하던 성적도 얻었고, 중국어를 무기로 입사에도 성공했으니 첫 외국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가히 높았다.


두 번째는 필리핀이었다. 돈에 굴복한 선택. 지금 와 후회한다. 어학연수 후 학위과정까지 고려하느라 비용효율적인 선택을 했다. 차라리 이 때 필리핀이 아닌 미국으로 바로 갔더라면, 나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었을까? 나중은 모르겠고 일단 영어나 배우면서 rich handsome Chinese 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만나거나 어떻게든 계속 체류하며 일을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알아주는 대기업, 나름 잘 나가는 교육 담당자 신분을 내려 놓고 늘 꿈꾸던 국제기구로의 도전을 위해 영어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다. 늘 내 발목을 잡아왔었던, 바로 그 영어. 그러니 절실했다. 한국 어학원을 택했지만 마음 맞는 한국 친구와 숙소에서도 영어만 사용하려 했고 교사들과 친해져 학원 밖에서도 만났다. 나중에는 한국어학원을 나와 어학원 교사 집 한 층을 빌리고 현지인들이 다니는 IELTS 학원에 등록했다. 영어권 국가에서 간호사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아 함께 어울리며 내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시험 운이 좋은 편인 나는 이번에도 4개월 만에 원하던 성적을 얻었다.


세 번째는 필리핀 생활에 이은 영국 학위 과정. 가장 아쉬움 많은 선택이었고, 그래서인지 유일하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온 외국 생활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까지의 외국 생활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할 필요를 알게 된 것.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두 번의 연수와는 목표가 달랐다. 한국 사람이든 외국사람이든 누구에게서건 필요한 도움을 받아 학위를 취득해야 하니까. 목표를 달성하는데 외국 친구보다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한국 친구가 더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이미 7년 전 졸업 후 손 놓고 있었던 분야(심리학이라 전문 용어와 지식이 난무하는)를 소규모 인원이(해당 전공 1학년 전체 인원이 4명), 토론을 기본으로 하는 수업에서 살아남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지만.



 




2% 정도 이뤄진 나의 꿈, 미국에서 살기는 시작부터 달랐다. 남편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도 같이 학위 과정을 밟기엔 우리에겐 돌봐야 하는 아이가 있고 자금도 넉넉하지 않았다. 2년 후에는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각종 지원의 대가로 지금의 회사에 5년은 근무해야만 한다. 내 비자와 경력으로는 취업도 어렵다. 영어라도, 항상 내 발목을 잡아왔던 영어라도 열심히 배웠으면 좋았으련만 첫 한 두 번의 시도가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자꾸 꺾이게 되니 쉬이 포기해 버렸다. 영어 실력을 높인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무언가를 해야하겠다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다 다시 없을 이 시절 아이와 함께 마음껏 즐기다 가자 싶었고 우리는 정말 열심히도 놀았다. 많이 다니고, 많이 경험하고, 많은 인연을 만들며. 아메리칸 드림 대신 아이와 함께하는 인조이 아메리칸 라이프. 마냥 좋을 수는 없었지만 꽤 많이 즐거웠던 우리의 2년을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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