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하바 Apr 12. 2021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 이야기


고백컨데 나의 신앙 생활은 좋아하는 선배로부터 시작되었다. 오해는 하지말자. 선배는 웃는 모습이 밝고 항상 당당했던 멋진 여자였으니까. 선배가 회장으로 있는 가톨릭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고등학생 때 갖게 된 나의 신앙. 기숙사 학교였기에 자연스레 매주 주일이면 다같이 성당에 갔고, 친구를 대모님으로 세례까지 받았다. 반면 남편은 아주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까지 받은 사람. 어릴 적엔 성모님 앞 고사리 손 모으고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스스로 올려 온 집안의 예쁨을 받았건만, 철이 들고 난 후로는 결혼 전까지 제 발로 성당을 찾아가 본 적이 없는 냉담신자였다. 아이는 자연스레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냉담자인 남편 없이 아이와 둘이서만 미사를 드리는 날이 더 많았었다. 그런 남편에게 미국에서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종교활동을 한 기간인 셈이었다. 자의던 타의던 봉사도 많이 하고, 심지어 독서에 십자가의 길 봉헌까지. 종교를 매개로 모였지만, 타국살이의 외로움과 힘듦, 기쁨을 가족처럼 함께 나누는 교민 사회 종교단체의 특징 때문이었다. 


명절이면 아이들도 어르신들도 한복을 차려입고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주고 받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공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는 장기자랑을 하고, 선물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는 공간. 미국에 이민 와 살아온 과정을 담은 자서전을 주시며, 팔순 잔치를 다른 누구보다도 성당 교우분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수줍게 웃으시던 할아버님을 모두 함께 축하하는 공간. 


특히 한 달에 한 두 번 진행하는 구역모임은 우리 가족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고백했듯 나의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아서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주일마다 미사에 가도 늘 겉도는 느낌이었다. 청년부에 속할 나이도 아니고, 학부모도 아닌 30대 초반의 우리에게는 미사 외에는 연결고리가 딱히 없었으니까. 미국 성당의 우리 구역은 특이하게도 지역이 아닌 "학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모두가 비슷한 연배,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는 가정. 같은 학교를 중심으로한 연대감. 덕분에 종교를 이유로 모였지만, 종교만이 중심이 되지는 않았던 모임. 우리는 그 곳에서 모두가 친구였고, 육아 동지였으며, 길게든 짧게든 해외생활을 함께 해나가는 동료였다. 아이는 언니, 오빠, 친구, 동생들과 어울리며 관계 맺는 법을 배웠다. 인생 어차피 혼자 사는 것이라 주장해왔던 남편에게도 동갑내기 친구들이 생겼다. 잠시 머물다 갈 사람들이건만 귀국하는 우리를 위해 여행을 준비해 주는 사람들. 그러고도 아쉬워 또 다시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고, 손수 준비한 음식 한 상 가득에 선물까지 베푸는 사람들. 진정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체험하는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교민 사회 종교 단체가 갖는 특징 때문일까? 남편처럼 한국에서보다 열심인 경우도 많았고, 무교였다가 외국 생활을 하며 종교를 갖게 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의 경우도 특이했는데 성당에서 사람을 얻었다면, 신앙적으로는 교회에 다니는 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이 깊어진 시간이었다. 20대 내내 조금 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위한 공부를 하고 싶다 생각해왔다.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성경공부를 미국에서 교회에 다니는 동생들과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매주 동생들과 함께 모여 성경 공부를 하며 그간 가지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항상 기도하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나눌 줄 아는 삶. 어느 종교에서건 이야기하는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이었다면 아무리 친한 동생의 권유라 해도 동생따라 교회 행사에 간다거나 하지는 않았을거다. 하지만 미국이었으니까, 성당에 비해 확실히 규모가 큰 교회의 부활절이나 할로윈 행사에 아이를 위해 함께 가보았다. 아이의 유치원 역시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 한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아이 유치원에서 알게 된 친구는 목회자 집안의 아이였는데, 남편과 나 모두 인정한다. 그 친구의 아빠만큼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기도와 성경을 이야기 속에 잘 풀어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친구 집에 방문할 때면 알게 모르게 친구 아빠의 기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 나 혼자 간직하는 비밀이다. 


종교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을 때도 그렇고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그렇다. 이것은 종교 이야기지만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이야기. 신앙 그 자체보다 사람이 중심이 된 이야기. 종교를 떠나 사랑하고 나누고 아끼며 함께하는 것을 배운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친구이자 가족 같은 한인 성당 사람들과의 기억


매거진의 이전글 아메리칸 드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