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하바 Jul 30. 2021

마녀를 찾아간 건 막내 인어가 아니었다(1)

딸을 위해 다시 쓰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1.

깜깜한 바다 위 별무리가 내린다. 일렁이는 물결 너머 저 멀리 희뿌연 형체가 보인다. '하나, 둘, 셋, 넷' 찬찬히 손가락을 짚어가며 세어 본다. '언니들인가? 하나가 부족한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인어 공주의 눈앞으로 동그란 형체들이 스르륵 다가온다.


"막내야!" 언니들이다. 그런데 셋째 언니는? 인어 공주의 눈은 바쁘게 언니들 사이를 훑는다. 아직 올라오지 않은 건가? 바닷속을 둘러보지만 언니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셋째 인어를 찾던 인어 공주는 문득 낯선 느낌에 다시 물 위로 얼굴을 내민 언니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물속을 헤엄칠 때면 물결처럼 일렁이던 언니들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이제는 간신히 어깨에 닿는 정도다. 의아한 표정의 인어 공주에게 첫째 인어가 다급히 말을 건넨다.


"이 칼을 받아. 널 구해달라고 우리 머리카락을 잘라 마녀에게 주었단다.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왕자의 심장에 이 칼을 꽂아. 물론 넌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포기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찌를 수는 없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네가 더 소중하단다. 네가 왕자를 사랑하는 만큼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는 널 사랑해. 왕자의 따뜻한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네 꼬리가 다시 자라날 거야. 서두르렴. 해가 금세 솟아오를 거야."


‘그런데 셋째 언니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막내 인어 공주는 손가락으로 간신히 물어본다.


"잠깐 갈 곳이 있대. 참, 이 말 꼭 전해달라더라. 왕자도 이해할 거라고. 그리고 나도 이해한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의아했다. 셋째 언니가 정말로 왕자를 죽이는 다른 언니들의 계획에 동의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언니의 말을 믿는 수밖에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 멀어지는 언니들을 뒤로하고 인어 공주는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가 잠들어 있는 침실로 들어선다. 달빛이 열린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 와 침대 아래로 반듯한 네모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 끝에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잠이 든 공주가 누워 있다. 왕자는 빛이 가닿지 않는 어둠 속에 있을 것이다. 옅은 한숨을 내쉬고 인어공주는 왕자가 누워 있을 자리를 손으로 더듬는다. 그러나 손에 와닿는 건 차갑고 보드라운 실크 이불의 감촉뿐이다. 왕자님은 어디에 있지?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 선 인어 공주 앞에 달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는 왕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쉿. 왕자는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몸짓으로 인어 공주를 끌어당긴다.



2.

"차마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왕자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왕자의 죽음을 알리는 의사의 말에 침대 끝에 몸을 기댄 채 간신히 서 있던 이웃나라 공주가 무너져 내린다. 어제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 새 신랑의 허망한 죽음 앞에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주저앉아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던 공주가 피 묻은 종이를 구깃거리며 왈칵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나를 코시테른 성에서 마주 보이는 바다 위 섬에 묻어주시오. 나는 자유롭고 싶소. 미안하오.'


왕자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왕자의 마지막 요청대로 그의 차가운 몸은 작은 배에 실린 채 섬으로 옮겨졌다. 지금껏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작은 섬. 멀리서 보기에는 바위뿐인, 생명의 온기를 찾을 수 없는 섬. 섬에 도착한 공주와 사람들은 움푹 파인 섬의 한가운데에 가득 핀 프리지아 꽃들을 발견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꽃들 한가운데 관이 놓였다. 가슴 위로 포개진 왕자의 양 손 사이에 한 송이 프리지아를 올려둔 건 공주였다. 섬을 떠나오는 배 안에서 공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배 안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왕자의 죽음을 선고받았을 때 무너져 울던 공주는 분명 웃고 있었다. 코시테른 섬을 떠나는 그녀의 치맛자락에서는 프리지아 향이 묻어났다. 왕자가 청혼하던 날에도 그는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꽃을 드리고 싶어요. 당신의 시작을 응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꽃이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새로운 시작이군요."

"아니, 나와 함께하는 건 그대의 진정한 시작을 위한 첫걸음일 뿐이지요. 곧 그대가 늘 바라 왔던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삶에... 당신이 함께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당신의 시작을 응원하기로 했답니다."


알쏭달쏭했던 그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코시테른과 아스카, 두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된 공주는 섬에서 가져온 한 송이 노란 프리지아 꽃을 매만졌다. 두 왕국의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다. 사랑은 없었지만 다정한 응원의 마음이 담긴 따뜻하고 화려한 결혼식,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3.

첫째와 둘째 공주에 이어 이번에는 자매들 중에서 제일 용감한 셋째 공주가 바다 위로 나갈 차례였다. 셋째는 바다로 흘러드는 넓은 강을 따라 헤엄쳐 올라갔다. 포도 넝쿨이 우거진 푸른 언덕이 멀리 보였고 늠름하게 서 있는 나무숲 사이로는 궁전과 대저택들이 힐끔힐끔 보였다. 좁은 시내에서는 아이들이 발가벗고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공주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어 다가갔지만, 아이들은 물속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 그때 작고 검은 동물이 다가왔다. 개였다. 하지만 공주는 개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개는 공주를 보더니 갑자기 사납게 짖어댔다. 너무 놀란 공주는 꼬리를 숨기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몰리? 몰리! 무슨 일이야?" 낯선 검은 동물 뒤로 눈부신 흰 옷을 입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단정히 넘긴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의 땀에 붙어서는 한층 짙은 고동 빛을 띤다. 남자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햇살에 빛난다. 공주는 눈이 부셔 살짝 찌푸린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꼬리를 숨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당황한 공주는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꼬리 끝이 물 밖에서 찰랑, 소리를 내고 뒤 이어 물속으로 들어간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은 공주의 꼬리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인간에게 제 정체를 들킨 공주는 조바심이 났다. 갈색 머리의 그가 혹여나 나쁜 사람이라면? 인어의 꼬리를 탐내어 바다를 헤집기라도 한다면? 가족들은 물론 왕국의 모든 인어들이 위험할 수 있다. 며칠을 고민하던 셋째 공주는 마침내 다시 남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위험한 일이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더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셋째는 매일 바다 위로, 더 멀리멀리 강의 상류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는 했다. 한 무리의 장사꾼들도, 와르르 웃음을 뱉어내며 걸음을 재촉하는 소녀들 무리도, 이제는 그 이름을 알게 된 개와 고양이까지. 육지의 수많은 모습들을 만났지만 여전히 그 남자는 보지 못한 어느 날, 셋째 인어 공주는 코시테른 성이 보이는 바다 위 작은 섬 위에 앉아 궁전 뒤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첨벙. 고요한 바다가 코시테른 성 근처에서부터 일렁인다. 호기심 많은 셋째 공주는 황급히 헤엄쳐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간다. 물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물속에 가라앉은 건가? 공주의 머리가 물속으로 들어간 순간 공주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토록 찾던 그 남자였다. 공주를 향해 똑바로 헤엄쳐 오는, 물에 젖어 진한 고동 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4.

분명 죽을힘을 다해 숨을 참고 있는 건데도 오히려 숨을 쉬는 기분이에요. 온 세계가 온전히 내 몸 전부를 빈틈없이 꽉 안아주는 느낌. 내가 살아있다는 그 느낌이 온몸 구석구석 혈관을 따라 채워지면 비로소 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갈색머리의 남자가 이야기한다. 눈부신 달빛이 바위섬 위로 떨어져 프리지아 밭은 황금색으로 일렁인다. 셋째 인어 공주와 갈색머리의 남자가 두 번째로 만나던 날 밤이다. 코시테른 왕국의 유일한 왕자인 그가 무엇이든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성 안에서의 시간보다 깊은 바다 안에서의 시간을 더 사랑한다 수줍게 고백한다. 물론 인어 공주는 남자의 말에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깊은 물속에서라도 인어들은 육지에서와 꼭 같이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자신들의 고향인 바다를 사랑한다 말하는 남자가 싫지 않다. 부러움과 호기심이 한껏 담긴 남자의 눈빛은 바다 위 별보다 밝게 반짝였다.


인어 공주는 왕자가 가보지 못한 깊고 먼 바닷속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자는 호기심 많은 인어공주를 위해 땅 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전해준다. 그렇게 둘은 매일 밤 프리지아 꽃들에 둘러싸여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마음껏 서로의 세상을 여행했다. 별이 빛을 잃고 바다 끝 멀리서부터 까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면 둘의 눈에는 아쉬움이 차올랐다.


"한동안 이곳에 오지 못 할 것 같아요. 이웃한 아스카 왕국에 다녀와야 하거든요. 며칠, 아니 혹은 몇 주일이 걸릴 수도 있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낮에는 당신을 위해 더 멀리, 더 깊이 헤엄치고 밤에는 언제든 당신에게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왕자에게 전할 새로운 이야기들을 찾아 매일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향하던 셋째 인어 공주는 어느 날 처음 보는 깊고 어두운 동굴을 발견했다. 벽을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던 인어 공주는 이내 동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할머니 방 구석진 곳에 숨겨져 있던 책에 나온 마녀 우르슬라의 동굴. 두려움보다 놀라운 이야기를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인어 공주는 마녀의 동굴 안으로 조용히 헤엄쳐 들어갔다.



-


2편과, 3편에서 계속 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