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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Jul 31. 2021

마녀를 찾아간 건 막내 인어가 아니었다(2)

딸을 위해 다시 쓰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다시 쓰기, 1편에서 이어집니다.)



5.

이건 뭘까? 언니의 방에서 처음 보는 작은 병을 발견한 막내는 병에 걸린 얇은 줄을 흔들어 보는 중이다. 셋째 언니 방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언니가 열다섯 살이 되어 물 밖으로 다녀온 이후부터, 가보지 못한 인간 세상이 너무나 궁금했던 막내 인어 공주는 가끔 언니 방에 몰래 들어와 둘러보고는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입구가 좁은 작고 예쁜 병에 담긴 핏빛의 액체를 발견했었다. 언니는 아무도 모르게 막내에게만 액체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만든 '와인'이라는 음료인데 마시면 몸은 붕 뜬 것처럼 가벼워지고 마음의 걱정은 조금 줄어드는 마법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아직 열다섯 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에게는 줄 수 없다 약 올리듯 말하는 언니의 말투에 제법 속이 상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나도 열다섯이니까 이 와인이라는 걸 마셔도 되겠지? 언니에게는 나중에 내가 육지에서 꼭 같은 걸로 아니 더 좋은 걸로 구해다 주겠다고 해야지.

 

막내 인어 공주는 얇은 줄 끝에 달린 작은 유리병 뚜껑을 열어 그 안의 액체를 조심스레 삼켰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막내 인어 공주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셋째 언니의 품에서 깨어났다.

 

"다 내 잘못이야. 이제 어떡하니 우리."

떨리는 언니의 목소리에 막내 인어 공주는 자신이 마신 것이 언니가 말한 와인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언니, 내가 마신 게 도대체 뭐야?"

"약일 수도 독일 수도 있는 것. 아아, 내가 항상 지니고 다녔어야 했는데... 미안해."

 

셋째 인어는 왕자를 만났던 날부터 우르슬라의 동굴에 찾아갔던 날까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네가 마신 건 마녀 우르슬라에게서 받은 약이야. 인어가 마시면 꼬리 대신 다리를 얻게 되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게 돼. 사람이 마시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다리를 잃고 꼬리가 생겨. 대신에 깊은 물속에서도 마음껏 숨을 쉴 수 있게 돼. 우리처럼."

"음... 목소리를 잃는 건 아쉽지만... 난 항상 사람이 되고 싶었어.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물들, 할머니가 이야기해 주신 향기가 나는 꽃, 집보다도 키가 큰 나무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직접 볼 수 있는 거잖아? 사람이 되어도 가끔 가족들을 보러 바다로 오면 되니까 언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 그리고 언니 물건 함부로 손댄 내 잘못인걸."

"아아...... 마녀 우르슬라는 절대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지 않는단다. 그 약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왕자님과 나를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졌어. 우리 둘 중 누구라도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는 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약속받지 못한다면 영원히 사라지는 저주가 걸려있거든. 나는 육지를, 왕자님은 바닷속에서의 삶을 꿈꿔왔지. 그 약은 우리의 마음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인지, 그 사람이 속한 세계에 대한 동경인지를 아주 잔인하게 확인시키기 위한 마녀의 장난인 거야."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으로 반짝이던 막내 인어 공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자님이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언니. 그럼 난 그대로 없어지는 거야? 아앗, 꼬리가 저릿거려."

"시간이 없어. 꼬리가 사라지면 인간 세상까지 올라가지도 못 하고 죽게 될 거야. 얼른 코시테른 성으로 가자. 그 약이 나와 왕자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한 거였으니 너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왕자님이 너를 도와줄 거야."

"악... 내 꼬리... 언니, 미안해."

 

 

6.

코시테른 성의 뒤편, 바다와 맞닿은 곳으로 막내 인어 공주는 온 힘을 다해 헤엄쳤다. 바다에 잠긴 계단이 보일 무렵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던 꼬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양날이 달린 날카로운 칼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막내 인어 공주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만 계단 끝에 다다르자마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바다 위로 높이 떠올라 있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온몸을 휘저었다. 인어 공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아름다운 왕자가 서 있지 않은가? 왕자는 새까만 눈으로 인어 공주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셋째 언니의 설명 그대로였다. 건강한 갈색 머리가 희고 깨끗한 이마 위에서 바람에 흩날렸다. '미안해요. 제가 언니와 당신의 사랑을 망쳐버렸어요.' 막내 인어 공주는 왕자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절망해 고개를 숙인 인어 공주의 눈에 꼬리 대신 희고 아름다운 두 다리와 발이 보였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언니와 함께 당신이 사라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볼게요." 왕자는 커다란 자신의 옷을 벗어 막내 인어 공주의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며 이야기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뾰족한 바늘과 날카로운 칼 위를 걷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인어 공주는 왕자의 손을 붙잡고 힘겨운 걸음을 옮겨 계단의 가장 위쪽, 코시테른 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에서 바다에 가장 가까운 곳,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한 성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인어 공주의 머리카락이 가벼운 바람에 흩날렸다.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린 막내 인어 공주는 그대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두 다리를 가지고 마음껏 이 아름다운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어.'

 

코시테른 성에는 흥미로운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왕자는 가장 먼저 인어 공주에게 글을 배우도록 했다. 총명한 막내 인어 공주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익혔다.  안의 사람들과는 필담으로 대화하며 각종 예법을 익혔다. 아름다운  다리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법도 배웠다. 인어 공주는 하루 일과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왕궁 도서실 창문가에 앉아 새로운 책들을 읽는 시간을 가장 사랑했다. 책에서  모든 곳들을 직접 가보고, 바다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하고 싶은 욕심은 인어 공주를 빛나게 했다.

 

"아가씨, 오늘은 파티를 위한 옷을 맞추시게 될 겁니다."

'저는 이미 충분히 많은 옷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파티인가요?'

"둘도 없는 경사로운 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이지요. 왕자님과 아스카 왕국 공주님의 결혼식이 보름 후에 이곳 코시테른 성에서 열린답니다.   내내  위에서 화려한 축하파티가 열릴 거예요."

 

 

7.

막내 인어 공주가 코시테른 성에  이후로 왕자는 인어 공주를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도서실에 찾아와서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건네고 사라졌다. 인간 세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막내 인어 공주는  다리는 물론 자신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역시 왕자님은 언니가 아닌 바닷속 세상이 궁금했을 뿐이었구나. 언니가 그 약을 마시고 다리를 얻는 대신 모든 것을 포기했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내가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벌인가 보다. 언니 대신 내가 사라지는 게 맞을지 몰라.' 배신감일까 두려움일까, 가보지 못한 인간세상에 대한 아쉬움일까. 막내 인어 공주의 몸이 떨렸다.

 

왕자와 아스카 왕국 공주의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막내 인어 공주는 도서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결혼식 하루 전 왕자가 인어 공주를 찾아왔지만, 책 속에 파묻힌 공주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조용히 나갔다. 막내 인어 공주는 왕자가 언니를 완전히 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가엾은 언니. 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을 잃을 셋째 언니와, 곧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두 왕국의 결혼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온 왕국에 울려 퍼졌다. 제단 앞에서 손을 맞잡고 주교님의 축복을 받는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웠다. 은과 금으로 된 옷을 입은 막내 인어 공주는 신부 들러리 속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멀리 바다에서 이 결혼식을 보고 있을 가엾은 언니, 이토록 아름다운 인간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녀 보지도 못한 채 영원이 사라지게 될 자신에 대한 연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날 저녁 신랑과 신부는 뱃전으로 나갔다. 결혼을 축하하는 폭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꼈으며 배 한가운데에는 황금빛과 자줏빛으로 치장된 화려한 방이 만들어졌다. 배는 순풍을 맞아 돛을 부풀리며 미끄러지듯 바다 위를 달렸다. 아침놀이 하늘에 번지기 시작하면 인어 공주는 저 바다 위 물거품이 되리라. 놀랍게도 마음을 헤집던 연민은 배가 바다 위를 달리기 시작하자 모두 사라졌다. 어느덧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막내 인어 공주였다. 해수면 아래에서가 아니라 배 위에서 보는 바다는 인간 세상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맞는 마지막이라면, 너무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아.' 바다 저 먼 곳을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인어 공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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