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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Jul 31. 2021

마녀를 찾아간 건 막내 인어가 아니었다(3)

딸을 위해 다시 쓰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다시 쓰기 1편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다시 쓰기 2편에서 이어집니다.





8.

배 위에서는 흥겹고 화려한 축제가 자정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인어 공주도 가슴속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안고서 선원들과 함께 웃으며 춤을 추었다. 배 위의 그 누구도 왕자가 자리를 비운 것을 모를 만큼 온 바다가 떠들썩하게 빛나고 있었다. 왕자는 북적이는 갑판을 슬쩍 벗어나 조용히 작은 배에 옮겨 탔다. 바위 사이를 지나 프리지아 꽃이 가득한 섬 가운데에 들어선 왕자는 초록 물약이 든 작은 병을 든 셋째 인어 공주를 발견했다.

 

"오! 드디어 마녀에게서 약을 다시 받은 건가요?"

"아니요. 인어가 꼬리 대신 사람의 두 다리를 얻거나, 사람이 인어의 꼬리를 얻을 수 있는 약은 더 이상 만들 수 없대요."

"그럼 동생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만들어 줄 약이군요."

"그것도 아니에요. 언니들도 마녀를 찾아갔어요. 모두들 나만큼 막내를 사랑하니까요.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내놓는 대신 마녀에게서 칼을 받아 갔어요. 당신의 심장을 찌를 칼이에요."

"어차피 우리가 함께일 수 없다면... 앞으로 나의 삶은 죽음과도 같을 거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저는 절대로 당신이 죽도록 두지 않아요. 하지만 이 약은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도, 막내를 살려주지도 못해요. 이 약만으로는요."

"마녀가 또 대가를 필요로 하는군요. 이번엔 무엇이죠?"

"처음 약에 걸린 대가와 같아요. 왕자님의 진정한 사랑이요. 진정 저를 사랑한다면, 그래서 남은 일생을 낯선 바닷속에서 저와 함께 지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언니들이 받아간 그 칼로 스스로를 찌르세요. 당신의 피를 한 방울, 이 약에 섞어 마시면 왕자님의 심장이 멈출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동생은 사라지지 않는 거요?"

"당신이 스스로 낸 피가 막내의 다리에 닿으면 칼 끝을 걷는 듯한 통증마저 완전히 사라진, 진짜 다리를 얻게 될 거예요. 영원히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거죠. 당신이 전해 준 이야기들처럼 그 아이는 인간 세상을 더없이 사랑하니 두 다리로 마음껏 더 많은 곳들을 누빌 수 있을 거예요."

"아아, 정말 다행이군요. 내 목숨으로 가엾은 막내 인어 공주가 사라지지 않고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난 정말 그대로 심장이 멈춘 채 죽어도 괜찮아요."

"마법 물약의 대가는 왕자님의 진정한 사랑이에요. 목숨이 아니라요. 심장이 멈춘 당신에게 제가 키스한 후 함께 바다로 내려가면, 당신의 두 다리는 사라지고 저와 같은 꼬리가 생길 거예요. 그런 모습이라도 괜찮다면, 왕자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대가는 충분하다고 했어요. 마녀는 진정한 사랑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해요."

 

 

9.

"당신이 날 찌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비록 언니의 사랑을 배신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언니를 아프게 할 선택은 하지 못할 성품을 가졌잖아요. 자, 당신의 놀랄 만큼 용감하고 멋진 셋째 언니가 구해 온 약이에요." 놀란 막내 인어 공주를 가볍게 끌어당긴 왕자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건 언니의 선택이에요. 그리고 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선택이랍니다. 그 칼을 나에게 줘요.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줘요."

 

배 위를 가득 채우던 불빛들이 모두 꺼진 깊은 밤. 열린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 온 달빛만이 침실 안의 세 사람을 비춘다. 막내 인어 공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왕자는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칼을 높이 들었다.

 

뚝. 칼에서 떨어진 핏 방울이 섞이자 물병 안의 초록색 액체는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달그림자를 따라 왕자의 가슴에서 솟구친 피가 흘러간다. 꿀꺽. 검붉은 액체가 왕자의 목을 따라 내려간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왕자를 위해 고개 숙인 채 기도하던 막내 인어 공주의 흰 다리에 왕자의 뜨거운 피가 와닿는다. 허리를 숙여 왕자를 침대 위에 바로 눕히고, 비어버린 병을 주워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온다. 달빛이 반짝, 인어 공주의 눈물방울 속에서 빛났다.

 

 

10.

"여왕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아가씨가 있습니다. 저 그런데 말을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불러들일까요?" 코시테른 성문 앞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 서 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기다란 복도를 지나 사뿐히 걸으며 그녀는 성 이곳저곳을 그리운 눈빛으로 훑는다. 여인이 안내받은 곳은 여왕의 집무실이 아닌 뽀얀 책 먼지가 마법가루처럼 빛 나는 왕궁 도서실이다. 몇 년 전 막내 인어 공주가 매일 같이 앉아 있던 창문 아래 앉은 여왕은 책에 둘러 쌓여 있다. 여인이 문을 닫고 들어서자 여왕이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본다.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처럼 여왕의 얼굴에도 따뜻한 미소가 번진다.

 

"당신이 언젠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어요."

'역시 왕자님의 말씀처럼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여인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종이 위에 마저 글을 적어 내려간다.

'왕자님께서 저에게 부탁하신 약속을 지키러 왔답니다. 누구보다도 코시테른과 아스카  나라를 사랑하고 현명하게 다스리실 , 왕자님께서 한치의 의심 없이 믿고 계셨던 강한 분께 제가 직접 보고 경험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들려드리러 왔어요.’

 

막내 인어 공주가 품에서 꺼낸 두툼한 노트를 꺼내어 여왕에게 건넨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찾아와 줘요. 왕자님은 정말로 저에게 진정한 시작을 선물해 주었고, 또한 더없이 소중한 친우도 함께 보내 주셨네요." 여왕이 막내 인어 공주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여왕의 가늘지만 강인한 손을 붙잡은 채 막내 인어 공주는 여왕이 앉아 있던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왕자와 셋째 언니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곳, 왕자의 차가운 몸이 뉘어졌던 곳, 노란 프리지아로 가득한 작은 바위섬이 보인다. 반짝. 바위섬 너머 먼바다에서 오묘한 빛 한 쌍이 물 위에서 빛을 낸 후 서서히 물속으로 사라진다.

 

잘 가요, 인어 왕자님. 언니와 함께 마음껏 바닷속을 여행하며 사세요. 저도 왕자님이 주신 이 두 다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 눈에 귀에 보고 담을게요.



- 끝 -

 

 


 

 

딸아이에게 인어 공주 책을 읽어주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인어 공주는 얼굴만 보고 반해 버린 왕자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무모했던 걸까? 그런 열정이라면 왜 왕자에게 자신을 알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왕자는 정말로 인어 공주가 자신을 구해준 걸 몰랐던 걸까? 마지막에 인어 공주는 왜 왕자를 죽이지 않고 물거품이 되기로 선택한 걸까?

 

무서운 마녀를 찾아가는 인어 공주에게 조금은 더 확실한 이유와 믿음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인어 공주 대신 보다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배울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인어 공주가 죽는 건 슬프다고 하는 아직 어린 일곱 살 아이이기에 '모두가 행복했습니다'로 끝나는 동화가 되어도 괜찮겠다 생각했습니다.

 

자유를 주는 바닷속으로 들어 가 인어가 된 왕자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동생을 구한 셋째 인어 공주도, 목소리는 잃었지만 두 다리를 얻어 세상을 배우는 막내 인어 공주도, 코시테른과 아스카 두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여왕(이웃나라 공주)도 모두가 힘든 일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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