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게으름뱅이들의 모임
게으른 사람들은 약속을 잡기까지 많은 내적 고뇌가 필요하다. 심지어 그렇게 어렵게 잡은 약속도 날씨가 좋지 않아서, 늦게 일어나서,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서 많은 이유로 취소하기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게으른 남편은 친구가 나 밖에 남지 않았고, 나 역시 일 년에 한 번 아니면 서로의 생사여부만을 확인하는 게으른 친구들과의 모임만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게으름이 어느정도냐 하면 몬테네그로 북부의 한 휴양지에서 열리는 "게으름뱅이 대회"에 참가한다면, 쉽게 1위 2위를 차지할 거라고 농담 할 수 있는 정도 였다. 앉아있는 건 못해도 누워 할 수 있는 건 다 할 수 있다며 말이다.
그런 친구들이기에 이번 만남에도 약속 날 아침에 확인 메시지를 저장되어 울리는 알람처럼 보낸다.
"야! 오늘 다 오는 거 맞지?"
이에 오는 답변은 더 가관이다.
"아마도.."
"그럴지도..."
"오늘은 비 안 오겠지?"
절대 오케이를 허 하지 않는 이런 게으른 뱅이들, 아마도 그들 자신도 신발 신고 문 밖을 나가기 전까지 나갈지 안 나갈지 확신할 수가 없기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중 꼭 메시지를 안 읽는 1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게으름뱅이의 고급 기술 중 하나인 24시간 잠만보 스킬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줄타기의 장인처럼 아슬아슬하게 기술을 뽐내다가 가끔 크게 떨어지곤 했는데, 오늘이 그날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으로 잠만보로 저장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맘보 내친구는 나에게 이렇듯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행동자체를 PTSD 증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보면’미술관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미술관 사건’
몇 년 전, 미술관에서 10분 넘게 오지 않은 그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분명 전화기 너머로 들려와야 할 "나 다 왔어"였는데, 뜬금없이 멸치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나 지금 일어났어..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
사람이 왜 너무 당황하면 말을 잃게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놀란 것은 "지금 일어났어"가 아닌 다른 날 다시 약속을 잡는 것이 귀찮아 어차피 자신을 기다려 줄 나를 알고 태연하게 "지금 준비하고 나온다"는 그녀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이미 볕 잘 들어오는 자리를 찾아 똬리를 틀고 있었으므로, 피리를 불어 나를 움직이게 해 줄 친구는 3시간 뒤에나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습관처럼 그녀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고, 오늘은 다행히 멸치 갈라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어! 걱정 마~오늘은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고맙다..."
10분이 어디냐.. 고맙다 친구야 나오기만 해 주렴, 이렇게 게으름뱅이들은 서로의 게으름에 한없이 너그럽다. 그렇기에 이렇게 오래 만남을 유지할 수 있는 거겠지?라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향하려는데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꼭 약속 나가야 해? 나 오늘 쉬는데.."
남편은 내가 자주 나가지 않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데 익숙하지 않아 한다.
"남들은 마누라가 친정 가거나, 외출하면 그렇게 좋아하는데 너는 안 그래?"
"응 난 너랑 있는 게 좋아, 그리고 너 신발 신을 때까지 고민하잖아 나갈까 말까"
"아니야!!"
나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신이 난 남편은 더 나를 붙잡기 시작했다
"가지 마라 나가지 마라 나랑 놀자!"
"가지 말라면 더 가고 싶다 이놈아!"
나는 다급하게 신발을 신고 나왔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핸드폰을 두고 온 걸 알아차렸다. 아 귀찮은데, 연락올데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놓고 갈 수 없기에 다시 집에 들어갔는데,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싸 게임해야지~! 이게 얼마만이냐~프리덤!!"
"......."
남편은 뒤통수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순간 멈칫했고 나는 그 모습이 측은해서 그의 처진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로봇이랑 많이 대결해라 사람이 무서워 컴퓨터랑 대결하는 휴먼..."
"....."
그렇게 돌아서 나오는데 남편 모니터 옆에 체인점 커피가 눈에 띄었다.
'이 자식 아침부터 세탁방 간다고 나가더니, 게임할 때 마실 커피도 사 왔네. 내가 나가서 서운한 게 아니고 아침부터 많이 설레었구나.'
이런 설렘을 자주 주는 건 옳지 못하다는 생각에 남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앞으로는 나갈 일 없을 테니까 오늘 많이 즐겨!"
나 없이 혼자 놀고 있는 남편의 일상이 궁금해 남편에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달라고 했더니 게임으로 드라마 한 편 하는 모습을 찍어 보냈다. 어쩌면 남편은 내가 없을 때 더 신난 것 같아 보이는 건 느낌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