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호텔의 탄생

먼지보다 더한 기억

by 야초툰

첫 출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호텔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특히 207호에 있던 유리병과 그 방에 들어간 손님이 계속 떠올랐다. 그 손님의 무표정한 얼굴, 션의 애매한 태도, 그리고 미라클 호텔의 특이한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퍼즐처럼 느껴졌지만, 조각이 맞춰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호텔로 향했다. 어제 손님이 남긴 흔적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로비에 도착하니 션이 벌써 나와 있었다.


"유라 씨, 오늘은 조금 이르네요."

션이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 대신 207호에 대해 물었다.


"총지배인님, 어제 들어간 손님은 어떻게 됐나요? 체크아웃하셨나요?"
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 저에게도 남은 시간이... 아닙니다. 일단 올라갈까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럼 207호를 청소를 해야겠네요."

조금만 더 일찍 올 것을. 추가 단서를 찾지 못한 탐정의 심정이랄까? 그래도 일을 해야지 싶어 207호를 향했다. 션도 나를 따라 걸었다. 복도를 걸으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어제 그 손님, 뭐 하시는 분이에요? 과거와 연관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의 대답은 마치 수수께끼 같았다.

207호에 도착하자 션이 문을 열었다. 방은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침대 시트는 정리되어 있었고, 창문 커튼도 반쯤 닫혀 있었다. 하지만 방 한가운데에 있던 유리병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어? 이건 뭐지?"
나는 유리병으로 다가갔다. 병 속의 금색 모래는 어제보다 훨씬 줄어 있었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액자 조각이 병 옆에 놓여 있었다.

"이건 손님이 남기고 간 건가요?"
내 질문에 션은 병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이 병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에요. 제 기억에서 남은 시간의 흔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시간의 흔적이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병 속의 모래를 다시 들여다봤다. 작은 모래알갱이들은 마치 자신만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유라 씨는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음... 글쎄요, 호텔에서 동료들과 일했던 소중한 시간이요."

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클 호텔도 그랬어요. 사람처럼 소중한 기억들을 많이 담고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점점 아무도 호텔을 찾지 않게 되었죠. 죽은 호텔이 된 거죠. 지나가는 사람에게 미라클 호텔에 대해서 물으면 다들 입을 모아 말했죠. 이미 한 물 간 호텔이라고. 그러다 결국, 폐업 신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죠."

"그런데요?"

"낡고 흉물스러운 건물이 명동 곳곳에 많다며, 갑자기 새로운 대안이라며 죽은 건물 살리기라는 프로젝트라는 게 발표돼요. 당연히 제일 낡은 건물인 미라클 호텔도 그 후보에 오르게 된 거예요. 뽑히게 된다면 일 년 치 월세와 마케팅 비용을 지원받게 된다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저희 사장님은 관심이 없었어요. 이미 죽은 호텔이라고.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폐업을 결정한 날, 저희 사장님이 마지막 투숙이 될지도 모른다며 호텔에 오셨죠. 그리고 207호에 묵으셨죠."

"그럼? 아까 그분이?"

"맞아요. 이 미라클 호텔의 사장님 고사장님이죠."

마치 그날을 상기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세상에 가지고 온 시간이 다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삶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말해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작은 순간과 거대한 전환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머릿속을 스친다고.


미라클 호텔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한때 화려했던 이 호텔은 수많은 손님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죠. 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냉정했고, 낡아버린 벽,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전화, 그리고 끊긴 발길. 호텔은 폐업이라는 운명 앞에 서게 되었죠. 그 순간부터 미라클 호텔은 자신이 품고 있던 과거의 모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미라클 호텔은 그 자체로 거대한 모래시계가 되었죠.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고, 그들의 기억은 모래알처럼 호텔 구석구석에 쌓였던 거예요. 침대 시트의 주름, 낡은 객실 키카드, 오래되고 먼지가 쌓인 로비 소파, 그리고 화려했던 207호의 유리병까지. 호텔에 머물렀던 모든 손님들의 과거는 그 자체로 호텔의 시간이 되었고, 이곳에 머무르면 가고 싶은 그때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죠. 저희 고사장님처럼 말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하던 추억이 많은 호텔이었다. 고사장에게 자기의 손으로 이 호텔의 폐업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끝이 저리게 아팠다. 그래서 폐업을 결정한 날, 호텔의 고사장은 마지막으로 207호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그곳에 묻고 오자고. 한때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곳이 이제는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명동의 거리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로비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그날 밤, 207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사장은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호텔의 기억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 안의 멈췄던 모래알이 다시 흐르는 것처럼, 무언가 자신 안에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올려본 천장에서 열린 문에서 황금빛 모래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고사장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팔을 휘휘 저었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모래알이 폐 그리고 간 목구멍까지 가득 차 정신이 혼미해졌다. 빛 그다음이 어둠이라니. 고사장은 어둠 속에 갇혔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방 안에서 과거의 모습을 목격했다. 죽기 전에 보는 주마등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하게 빛나던 로비, 손님들로 가득 찬 레스토랑, 프런트 데스크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직원들. 그리고 환한 미소로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

"준아."

"아버지, 이게... 어떻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그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단다."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미라클 호텔을 처음 열던 날. 아버지와 처음 호텔에 왔던 기억에 대해. 분명 사라졌다고 생각한 미라클 호텔의 기억이 마치 젖은 신문지로 뿌연 유리창을 닦아내듯 선명해졌다.


"준아, 이곳은 새로운 호텔이 될 거야. 아버지가 말했지.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죽음은 끝인 것 같지만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단다. 나 역시 죽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야. 준아, 기억해라. 네가 이곳의 모래시계가 되는 거다. 시간을 되돌려. 죽은 호텔을 살릴 수 있게. 잊지 마라. 너는 이 호텔의 주인이야. 직원을 찾아. 다시 호텔을 살릴 수 있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이 모래시계를 주어라. 그의 시간을 되돌려 줄 거다. 그러다 보면 미라클 호텔도 너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야. 준아."

아버지, 고 사장은 잠에서 깼다. 하지만 모든 기억들이 생생했다. 그를 잡았던 따뜻했던 아버지의 손의 감촉도 아직도 그대로였다. 눈에 흐르던 뜨거운 눈물 자국이 거울에 비쳤다. 꿈인가? 싶었던 그때. 바로 옆 테이블에 아버지가 건네준 모래시계가 놓여 있었다. 꿈처럼 빛나는 그 자태로. 그 순간, 고사장은 깨달았다. 미라클 호텔은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담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호텔의 본질이었다. 미라클 호텔은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억을 재현하고, 다시 경험하게 했다.


"이 호텔은 죽은 것이 아니었어. 내 기억도."

고사장은 그제야 깨달았다. 호텔은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과 사람들의 기억을 엮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고사장은 다음날 아침 션에게 말했다.


"호텔을 다시 열어야겠네. 내가 틀렸어. 이곳은 죽지 않았어."


기억, 호텔을 다시 살릴 직원. 나는 션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타임머신도 아니고 과거로 어떻게 돌아가냐고 요즘 세상에 그런 사기에 넘어갈 사람은 없다며 션을 째려봤다. 션은 고사장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감정이 격양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자신 역시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말했으니까.


"미라클 호텔은 단순한 타임머신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과거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그리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유라 님이 과거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면 현실이듯,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에 당신이 적임자라는 것을. 그리고 고 사장님도 동의하셨습니다. 207호에 유라 님이 다녀간 뒤로 모래알이 빛나기 시작했다고."

"에이,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말도 안 돼요."

션은 그렇게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달려있는 황금 모래시계를 뺐다. 그리고 억지로 내 손을 펴서 그곳에 놓았다. 모래시계의 시간이 마치 주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짝 빛났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치 그 빛나는 모래시계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느껴졌다.

"제 시간은 여기서 끝이지만, 당신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제 이 호텔은 당신의 기억이에요. 당신이 가장 빛나던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 거예요. 물론 쉽지 않겠죠. 과거를 다시 바꾸는 건.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 말했던 그 기세로. 그 음성으로 미래도 바꿔보세요. 혹시 알아요. 다른 현실이 펼쳐질지."


나에게 모래시계를 넘겨준 션은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바로 내 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고 사장의 기억의 조각이라는 듯. 다리부터 천천히 지우개로 지워지듯 그렇게. 션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나에게 말했다.


"이제 207호로 다시 가 보세요. 그곳에 당신의 과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믿기 힘들 일이 내 눈앞에 펼쳐지다니. 이건 영화 아니 드라마에서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바꿀 수 있다고. 어제 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과거라니. 도망가고 싶었다. 미친 일이 엮이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친 곳에 취직했어. 정신병자의 소굴이야.라고 외치며 달리는데, 내 눈앞에 207호가 나타났다. 마치 내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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