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호텔 미라클
'어언당'의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끝순과 순자가 남기고 간 검은 노트를 바라보며 나는 복잡한 마음에 휩싸였다. 호텔은 분명 오래된 시설 같았지만, 묘한 활기가 흐르고 있었다. "재밌는 곳"이라는 끝순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렇게 재미있으면 왜 떠나는 건데요..."
작게 중얼거리며 노트를 열어봤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손글씨로 적힌 예약 정보와 알 수 없는 메모들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미스 P, 305호: 분홍 장미 꽃다발 요청"
"미스터 H, 207호: 새벽 2시 깨워달라 함, 이유 불명"
"주의: 미스터 K, 108호. 알람 금지."
뭐지, 이 호텔만의 규칙이라도 있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노트를 덮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추측만 해봤자 소용없었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고시원 창문 틈새로 스며들었다. 나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두려움과 가벼운 긴장감과 설렘을 안고 미라클 호텔로 향했다. 새하얀 셔츠에 네이비블루 재킷을 걸치고, 적당히 닦아낸 단화를 신고 출근길에 나섰다. '유니폼은 따로 없어요. 그냥 깔끔해보이는 옷으로 입고 오세요.' 라고 말한 션을 떠올렸다. '유니폼이 없는 호텔이 있었던가?'호텔은 집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였기에, 그냥 가까운 거리 산책하고 온다고 생각하자. 라며 호텔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하니 총지배인 션이 벌써 나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주름하나 없는 검은 정장을 입고, 그 특유의 황금 모래시계 배지를 달고 있었다. 나도 주지. 유니폼. 지배인과 인턴의 차이인가. 입이 나도 모르게 삐쭉 나와버렸다. 그 모습을 션이 본 건지, 대뜸 인사를 건냈다.
"어서 오세요, 유라 씨. 첫 출근이네요. 기분은 어때요?"
션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요. 사실 혼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 대답에 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호텔에선 모든 일이 저절로 풀릴테니까. 아니 이젠 유라씨 호텔이라고 하는게 맞겠죠?"
"그게...무슨?"
그는 나를 로비 안으로 안내했다. 로비는 어제와 다르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피아노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선, 오늘은 제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션은 안내 데스크를 지나 객실로 향하는 복도로 걸어갔다. 낡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지만, 세월의 흔적과는 다르게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지금 저희 호텔은 총 5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1층 2층은 임대층이고, 객실은 3층부터 5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총 50개의 객실로 이루워져 있죠. 그래서 작은 호텔답게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강점이죠. 스몰 럭셔리 호텔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중,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예약은 거의 없는 것 같던데요? 어언당에서 본 노트도 꽤 오래된 것 같고..."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가? 처음엔 날 선 내 질문에 션은 잠시 멈칫하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유라님은 눈치가 빠르신 편이네요. 맞아요. 다 오래된 것들이요. 이미 30년 전 일이니까."
그의 표정에는 어딘가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몇몇 방을 둘러보았다. 객실은 하나같이 소박했지만 깔끔하고 아늑했다. 벽에는 꽃무늬가 그려진 벽지가 붙어 있었고, 오래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 객실 문 앞에서 션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207호예요.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죠."
션이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놀랍도록 깨끗했다. 창가에는 빛바랜 커튼이 걸려 있었고, 침대는 마치 방금 정리된 듯 단정했다. 하지만 방 한가운데에는 웬 불투명한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이건 뭔가요?"
병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션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건 호텔의 '기념품' 같은 거죠. 과거 손님이 남기고 간 물건이에요. 미라클 호텔에는 이런 물건이 꽤 많답니다. 시간의 흔적이라고 할까요?"
병 속에는 작은 모래알처럼 보이는 것이 담겨 있었다. 모래알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작은 모래시계 같았다. 호텔 투어를 마친 뒤, 나는 데스크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손님은 없었다. 로비는 여전히 고요했고,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분명히 뭔가 있다. 이 호텔은..."
그때, 오래된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받아보세요. 그게 유라 씨의 첫 번째 업무니까요."
션이 전화기에 있는 별표 표시 버튼을 눌렀다. 나는 천천히 수화기에 볼을 대었다. 손끝에 살짝 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첫 근무에서 첫 전화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화기를 들어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미라클 호텔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자동응답기 같았다. 호텔에서 일했을 대 수없이 외쳤던 질문.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207호를 예약하고 싶습니다."
207호라니. 불과 몇 시간 전 션과 함께 들어갔던 방이었다. 내 머릿속에 방 가운데 놓여 있던 투명한 유리병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예약을 진행하려고 끝순 씨가 준 예약장부를 서둘러 넘겼다. 그러니까 그 객실이.... 문득 션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207호는 가능합니다. 성함과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호텔료는..."
"필요 없습니다. 오후 3시, 내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목소리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단호하게 끊겼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요?"
션이 물었다. 나는 방금 들은 내용을 그대로 설명했다. 션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207호라...벌써 때가 되었나보네요."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모를 기대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션의 안내에 따라 207호를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침구를 새로 갈고, 욕실을 점검하며 손님의 방문을 대비했다. 하지만 방 안에 놓인 유리병만큼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 자리에 그냥 두세요."
나는 들었던 모레시계를 다시 내려두었다. 찰랑. 순간 모래 시계 안에 모래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본건가? 몸이 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방 정리를 끝냈다. 오후 3시가 가까워지자 나는 로비로 내려왔다. 207호를 예약한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호텔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들어 확인했지만,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문뜩 바람이 스쳐가는 찬 공기를 느꼈다. 스르륵 문 앞에 회전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호텔의 정적을 깨듯이, 바람을 가르며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남자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회색빛 정장이 그의 몸에 꼭 맞았고, 깊은 주름이 진 얼굴은 무언가 무거운 시간을 겪어온 듯 보였다. 얼핏 지팡이를 바꿔 쥔 그의 손목에 값비싼 시계가 보였다."진짜겠지?" 나는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깊게 페인 주름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207호를 예약한 사람입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내가 그를 안내하려 했지만, 션이 먼저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션은 그 남자를 맞이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님은 별다른 대꾸 없이 조용히 션을 따라갔다. 나는 로비에 혼자 남겨진 채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액자에서 본 장면처럼 갈색 배경의 복도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몇 분 후, 션이 다시 로비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한층 진지해 보였다.
"무슨 일인가요?"
내가 묻자, 션은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손님은 특별한 분입니다. 모래 시계를 다시 돌릴 수 있는 분이라고 해두죠."
"모레시계요?"
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미라클 호텔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호텔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다시 돌아오는 곳이죠. 자세한 이유를 묻지는 마세요. 이곳은 그런 호텔이니까요."
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표정에 묘한 확신이 서려있었다. 션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저에게 아직 하루가 남아 있으니까요."
첫날부터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신비로움이 감돌았다. 로비에 혼자 앉아 있던 나는 207호로 들어간 손님과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유리병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미라클 호텔... 정말 이상한 곳이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노트를 다시 펼쳤다. 뭔가 단서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7호, 특별한 호텔, 시간이 흘러서 다시 돌아오는 곳. 남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