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은 항상 봄이 되었다.
<남편의 버켓 리스트>
4월인데, 벌써부터 초여름 날씨 같다. 필라테스를 하는데 벌써부터 땀구멍이 열렸는지 땀이 줄줄 흘렀다. 벌써부터 이렇게 덥다니, 갑자기 우리 집 털북숭이 강아지가 걱정되었다. 가뜩이나 더위를 많이 타는 데다가, 털도 이중털인 야초.
그래서 서둘러 운동이 끝나자마자 야초 미용 예약을 했다. 비록 주인은 추노꾼처럼 머리가 산발이 되어도, 우리 집 마스코트 귀염둥이 야초는 항상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보통은 예약 잡기 어려워 2주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빠르게 전화를 해서인지 바로 다음날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역시 행동이 빠른 자가 행운을 낚는다.
"아초, 그럼 일요일 11시에 예약해 둘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 강아지 이름은 야초예요."
"아. 네, 그러니까 아초여."
3년 차 단골 미용실인데 주인은 아직 야초를 아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야초든 아초든 우리 강아지를 예쁘고 사랑스럽게 대해주는 사장님이었기에 사소한 실수는 솜사탕처럼 녹아버렸다.
남편에게 내일 야초 미용을 예약했다고 말했더니, 뜻밖에 제안을 건넸다.
"그럼, 우리 미용실 근처 카페 갈까? 너는 글을 쓰고 나는 뜨개질을 하고 어때? 카페에서 뜨개질해 보는 게 내 버켓 리스트인데 들어줄 꼬야?"
심하게 혀가 꼬인 말투였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냐?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나는 말을 잃었다. 어차피 더 말을 해 그를 자극해 봤자, 얻는 건 왜 자기 버켓리스트가 되었는지에 대한 지루하고 긴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에 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야초 미용은 보통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그래서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이기도 했다. 방구석 뜨개질러가 뜨개질 도구를 들고 야외에 나가는 것이. 이번에는 작게나마 응원해 줘야겠다 싶었다.
“그래, 그러자.”
다음날이 되자, 방구석 뜨개질러는 뜨개질을 들고 처음 하는 외출에 신이 난 듯 엉덩이를 흔들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이 난다. 신이."
그에 반면 나는 신속하고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쳤다. 덜렁 손에 든 노트북 가방과 추레한 츄리닝복을 숨길 수 있는 품이 큰 초록색 잠바를 입었다. 그렇게 나는 준비가 긴 남편을 소파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날 기색도 없는 게 아닌가? 들리는 건 작은 방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아, 오늘도 외출이 쉽지 않겠구나. 야초야.’
가방에서 자신의 미래를 모른 채 산책 가는 줄 알고 신나 있는 야초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 남편 발 앞에 연애시절 내가 사준 큰 망치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뜰 수 없는 여러 색의 실과 실타래가 담고 있었다. 또 언제 산 건지 모르는 코바늘을 담는 필통과 회색 핸드폰 거치대가 얼핏 보였고, 마지막으로 실 거치대까지 넣으며 나에게 다 되었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다 쓸 수 없는 것들을 쓸어 담고 해맑게 웃는 그에게 그냥 너 혼자 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야초 예약도 했으니, 이번 한 번만 참자.라는 굳은 마음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야초 미용시간에 맞춰 맡기고 그 앞 커피숍에 도착했다. 다행히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없이 한산했다. 음료를 시키고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누가 그랬던가? 뜨개질은 실과 바늘만 있으면 된다고. 우리 남편은 뜨개질을 하기 위해서는 바늘과 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준비물이 필요했다. 타탁타탁. 카페에 자리를 잡은 남편은 자기가 가져온 것들을 테이블 위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란한지고. 부산하고 소란스러운 그를 보니 어릴 때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풍경이 떠올랐다. 열람실에 앉아서 주변을 관찰하다 보면 공부를 잘하는 친구는 입장부터 달랐다. 자리에 앉는 시간도 아까워 책을 읽으면서 들어왔으니까, 가방은 또 얼마나 가벼워 보이는지 오늘 볼 양의 책만 들어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는 친구는 무슨 책이 잔뜩 들었는지 가방이 항상 엉덩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그 책들을 한참 정리하다가 결국 얼마 안 가서 집에 돌아갔다. 남편의 학창 시절이 그려졌다.
그래서 이렇게 그냥 놔두면 오늘도 왠지 그의 학창 시절처럼 정리만 하다 돌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에게 말을 걸기로. 남편에게 말을 걸려면 늘 용기가 필요했다. 끝을 알 수 없기에. 뭘 만들 건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나를 위한 여름 모자를 뜰 거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직 여름이 아닌데.라고 했더니, 미리 준비하면 좋다며 배시시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나는 여름은 네가 먼저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남편의 배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내 배는 금방 빼. 그런데 뜨개질은 오래 걸리잖아. 말 시키지 마. 이제 떠야 해."
그는 황급히 뜨개질을 시작했다. 작전 성공. 내가 치는 타자소리와 코바늘에 실을 감는 소리가 오묘하게 어울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샥샥.
삼십 분쯤 지나서야였을까? 남편이 카페에서 뜨개질을 하니 더 잘 떠진다며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없어.라고 말하려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나처럼 노트북을 가져와 글을 쓰는 사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떠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남편처럼 뜨개질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있다 해도 남자는 드물었다. 그동안 집에서 남편은 혼자 뜨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다음에는 카페를 오지 말고, 뜨개질 모임을 가봐. 완전 너 인기인이 될 것 같은데?"
"그럴까? 그것도 내 버켓 리스튼데."
"뭔 놈의 버켓 리스트가 그렇게 많데?"
"많으면 좋지. 하루하루가 소중해지잖아."
"모임을 가면 남자는 없고 다 아줌마나 할머니일 텐데. 괜찮겠어?"
"그럼, 더 좋지. 아줌마들이 다 나 좋아해. 특히 할머니도."
뜨개질을 하면서 남편은 안된다는 말보단 된다는 말을. 하기 싫다는 말보다는 해보자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어색해서 피했을 상황도 오히려 좋아.라고 말하게 되었다. 내 옆의 남편은 분명 삼 개월 전의 남편과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는 뜨개질을 하면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우리는 어렸을 때 누구나 가슴속에 구멍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면서 그 구멍에 무뎌져 살고 있다가. 우연히 찾게 된 자신의 취미로 인해 그 구멍에 꽃이 피게 된 게 된 것이다.
나에겐 그 꽃이 글이었고, 남편에게는 뜨개질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제 항상 봄이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마음에 봄이 오길 바라게 되었다. 봄은 늘 어김없이 오니까.
글을 쓰며 뜨개질을 하며 하루를 뿌듯하게 보내서 인지 밤이 되어서도 마음이 봄 햇살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가 다 떴다며 여름모자를 가져왔다. 내 머리에 쓰니 모자가 너무 큰 게 아닌가? 역시나 나를 위해서 뜬다더니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써야겠다며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를 보니 따뜻했던 마음이 금세 불타올랐다.
코바늘은 내가 비록 포기해 버렸지만, 대바늘은 기필코 너를 이기리라 굳은 다짐을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곱씹었다.
<그때, 그 사람>
굳이 이름은 몰라도
그때 그 사람이라고 말하면
너는 안다며 방긋 웃음 짓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