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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Apr 29. 2020

"가족"이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국은 한국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대대적인 "lockdown"이 시행되고 있다. 3월 23일부터 학교폐쇄는 물론이고 생필품 가게와 약국을 제외한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결혼식과 종교모임도 금지되었다. 여가활동 및 불필요한 외부활동이 강제적으로 멈춰버렸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보다는 "가택연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이다. 나 역시 갑작스럽게 "Stay at home" 정책에 떠밀려 예상보다 훨씬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국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가게 되었다. 어제 이웃 친구가 "석방일이라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톡을 했는데 어찌나 헛웃음이 나던지!


이렇게 살다 보니 내가 사는 곳이 영국인지 한국인지 다른 어느 나라인지 모를 지경이다. 갑자기 이름 모를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그 어느 나라도 아닌 "가족"이라는 나라에서 달랑 우리 네 식구만 살고 있는 것 같다.


집에만 갇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아까웠지만 가장 아쉬운 건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이제 막 말문이 트여서 나불대기 시작한 꼬맹이의 영어도 아까웠고, 다짜고짜 시비 거는 또래들과 치고받고 싸우다가 일주일간 봉사활동을 해야 했던 큰 아이의 당찬 학교 생활도 아까웠다. 우리에게 주어진 딱 2년의 유학 기간.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내며 이제 좀 살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Stay at home" 한 달째.
시간이 빨리 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뭐 하지, 밖에도 못 나가는데 뭐 하지, 여행도 못 가는데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그랬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더 바빠지고 바빠졌다. 밥하고 치우는 일이 더 잦아졌고, 잔소리할 상황도 시간도 늘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별미까지 해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 의지와는 별개로 느닷없이 홈스쿨링 교사로 임명되었는데 걔네들이 내 새끼라서 어쩔 수 없이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기 시작했나 보다.


그래서 나의 시간이 없어졌다.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라는 가슴이 턱 막히도록 올곧은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물리적 시간이 아닌 나의 에너지가 축이 나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로 조심스럽게 항변해본다.

천성적으로 게을러서 가뜩이나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미약한데 그 힘을 아이들의 홈스쿨링과 밥하고 치우는 집안일에 쏟고 나면, 나에겐 남아 있는 건 인터넷 서핑이나 넷플릭스 시청 정도의 소극적인 에너지일 뿐. 여유를 부렸다가도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모두 아이들의 뒤치다꺼리일 뿐이고, 해야 하는데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일은 전부 나에 관한 것이라니.. 나에겐 게으르고 남에겐 부지런한 꽤나 모범적인(?) 주부의 삶을 즐거우면서도 씁쓸하게 잘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가끔.. 허무하고 공허해질 때도 있다. 이렇게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를 돌아볼 때, 그리고 언젠가 남편과 아이들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내가 애썼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엄마가 더 부지런했으면 될 걸 그렇지 않아 놓고 왜 자꾸 우리 탓만 한다고 생각할까? 그리고 나 자신은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영국 감옥"에 갇혀 난생처음 "가족"이라는 나라에서 살게 된 요즘. 가끔 즐겨 읽던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그가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나는 그의 커피가 되고 그가 배고프면 난 그의 밥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나보고 책 좀 읽어, 하자 나는 드디어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보니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엄마의 시간 속에서 다시금 온전한 나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런 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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