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감옥에서 찾은 엄마의 취미생활
영국에 락다운이 시작되면서 2명을 초과하는 모든 모임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내가 다니던 영어수업과 인터내셔널 모임 역시 중단되었다. 오직 "가정생활"만 허락된 이 독특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내 스스로 "엄마의 역할"을 강조한 그즈음부터, 겨우 끌고 오던 내 영어 공부에 대한 의욕과 동력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홈스쿨링과 삼시 세끼에 더 신경을 쓰게 된 요즘.
하루 종일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니 나 혼자 조용히 있을 시간은 더 부족해졌고, 밤늦게 아이들이 잠든 후 허락된 자유 시간엔 이미 나의 에너지는 방전된 상태. 뭐라도 나를 위한 생산적인 활동을 했으면 좋겠지만 그러자니 피곤하고.. 그렇게 내가 선택한 취미생활은 "넷플릭스" 보기!
영국 넷플릭스는 한국 자막이 지원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영어 자막으로 시청하고 있다. 영어 자막을 통해 넷플릭스를 본다는 건 틈틈이 일시정지를 눌러대며 모르는 단어를 검색했다가, 잘 이해되지 않는 문구를 해석했다가, 흐름이 너무 끊긴다 싶으면 그냥 눈치껏 때려 이해해야 하는 다소 귀찮은 과정이 필요한데..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용에 빠져들어 '한 편만 더 보고 잘까?', '에라 모르겠다!', '아 나 미쳤나 봐.'의 단계를 거쳐 밤을 새 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문득문득 내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지, 리스닝을 하고 있는 건지, 리딩을 하고 있는 건지, 뭘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지만 이제는 이렇게 영어 자막으로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되었다. 종종 추천 목록에 뜨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나를 유혹하지만 한 번 손대면 정말이지 그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기특하게도 잘 참아내고 있는 중이다.
1. THE END OF THE FxxxING WORLD
나를 영드의 세계에 입문하게 만든 작품. 고등학생 신분의 사이코패스 남학생과 사회 부적응자 여학생의 만남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설정으로 시작. 그러나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이토록 어리고 순수한 아이들이 왜 그렇게 삐뚤어진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했는지, 왜 그렇게 잘못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두 주인공을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이 안쓰럽고 측은해지는 작품. 남편이 뭐 이렇게 잔인한 걸 보고 있냐고 할 때, 이거 잔인한 거 아니야~ 되게 슬픈 내용이야! 이랬던 기억이..
"THE END OF THE FxxxING WORLD"는 넷플릭스를 신청하기 전 "Channel 4"를 통해 무척이나 길고도 긴 광고 시간을 견뎌내며 시즌 2까지 마무리했었다. 그러다 넷플릭스로 시즌 1만 한 번 더 시청.(시즌 2는 아직 넷플릭스에 없음.) 두 시즌 모두 각각 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20분 남짓으로 짧은 편이고, 시크한 사춘기 소년, 소녀의 단답형 문장 구사 덕분에 영어에 대한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영드 "셜록"이 좀 어둡다, 딱딱하다, 어렵다고 느끼는 분에게 추천!
2. Killing Eve
bbc에서 방영된 작품으로, 아직 넷플릭스에서는 만나볼 수 없다. 대신 bbc iplayer를 이용해서 시즌 1,2를 마무리! 참고로 현재 시즌 3가 방영 중이다.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킬러와 평범해 보이는 영국 정보부 요원의 추격 스릴러. 다음 에피소드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기막힌 엔딩 장치 덕분에 미친 듯이 정주행하고 말았다. 중간중간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사람 죽이고 죽는 장면이 질리고도 지겨워서 그만 볼까 싶은 순간도 있었는데.. 킬러 역을 맡은 "조디 코머(Jodie Comer)"의 오싹한 눈빛과 소름 돋는 연기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스토리보다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녀의 눈빛과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 저 여잔 진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
한국계 미국인 "산드라 오"의 연기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더군다나 그녀가 한국계인 덕분에 현재 방영 중인 시즌 3에 한인식당이 가끔 등장하는데, 기대보다 꽤 많은 분량의 한국인과 한국어를 접할 수 있다. 만약 "killing eve" 감독이 한국인이었다면 절대로 허락되지 않았을 어색하고도 어색한 한국말 연기였지만, 낯선 땅에서 영어에 치이면서 영드를 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한국말은 무척이나 반갑고도 반가울 뿐이다.
3. YOU
killing eve 시즌 1,2를 끝내고 난 후 선택한 미드. 나의 시청 이력을 감안했을 때 순서상 잘못된 선택이었다. 줄거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궁금해서 보기 시작한 것뿐이었는데.. 그 역시 완전 미친 스토커, 사이코패스였던 것이다.
killing eve 보면서 정말 살인에 질리고도 질려있었던지라.... 또, 또야..? 이러다가 이왕 시작한 거 그냥 보자, 라는 마음으로 결국 다.. 봐버렸다. 자상하고 따뜻한 외모를 지닌 뉴욕 한 서점의 매니저가 우연히 만난 여대생에게 첫눈에 반해 시작된 사랑. 그러나 그의 과도한 집착과 비뚤어진 욕망으로 그녀 주위의 인물을 하나씩 제거해나가고 결국엔 그녀까지 죽이고 만다.
예상치 못 한 어두운 줄거리 때문에 시즌 1만을 겨우 끝내고 시즌 2는 남겨둔 상태. 다음에 다시 잔혹한 사이코패스가 그리워지면 그때 다시.. 봐줄게!
4. DOCTOR foster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는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원작, DOCTOR foster!
첫방부터 화제가 되었던 "부부의 세계"가 BBC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것이라는 기사를 접하곤 바로 검색 시작. 그랬더니 그 원작에 "Killing Eve"에서 내가 반해버린 "조디 코머(Jodie Comer)"가 출연한 것이 아닌가? 대박!
두 시즌 모두 50분가량의 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부부의 세계"에서도 그랬듯이 하이라이트는 역시 시즌 1 마지막 에피소드! 그냥 그렇게 멋지게 마무리되었으면 좋았을걸.. 시즌 2는 에피소드가 진행되면 될수록 고구마를 100개 먹은 듯 답답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로 전개되다가, 점점 남자 주인공의 찌질함은 극에 달하고, 마침내 어이없는 결말로 기운이 빠지게 만든다. 부디 "부부의 세계"는 원작보다 좀 더 속이 후련한 결말로 끝내주길!
5. THE STRANGER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의 아내에 대한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곤 달아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스토리. 그리곤 의문투성이의 여러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드라마 시작부터 끝까지 낯선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지, 그 남자의 부인은 왜 사라진 건지,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지 등에 관한 복합적인 의아함과 궁금증이 끊이지 않는다. 결론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내내 궁금증과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기묘하고도 이상한 사건들이 촘촘하게 전개되어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시간 순삭"!
6. I AM NOT OKAY WITH THIS
드라마 제목부터 시작해서 포스터, 등장인물, 예고편까지 모든 느낌이 "THE END OF THE FxxxING WORLD"와 매우 비슷하게 느껴졌던 드라마. 이 작품 역시 사춘기 소년, 소녀의 복잡한 심리와 방황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 걸까? 이런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오히려 기대보다 더 재미있었던 "I AM NOT OKAY WITH THIS". 시즌 1의 충격적인 엔딩 장면 때문에 시즌 2가 더 기대되는 작품이다.
7. 그 밖의 영화들
넷플릭스에서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 3편 선정! 이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건 "ISN'T IT ROMANTIC"! 일단 여자 주인공이 무척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갔고, 내용 전개가 뻔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고, 모든 로맨틱 코미디의 요소를 다 짜깁기해서 총망라해 놓은 연출력이 유쾌했다.
"LOVE WEDDING REPEAT"은 "어바웃 타임"의 넷플릭스 버전인가 싶어서 보게 된 작품, "TIME FREAK"는 "오티스의 비밀상담소"에 출연한 남자 주인공이 귀여워서 그의 작품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두 작품 모두 심심풀이로 시간 때우기는 좋으나 큰 재미를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