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드윈 Feb 09. 2024

명작 다시 읽기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오랜만이야 조제, 잘 지냈지?


"오랜만이야 조제, 잘 지내지?"




 요새 동아시아 영화를 자주 보게 되네요. 예전엔 서양 영화들이 더 재밌고 좋았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비슷한 문화권에서 비슷한 문화를 가진 아시아 영화들이 좋더라고요.


 최근엔 일본 영화를 좀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건 재일교포인 '이상일' 감독님의 '분노'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설정이 좀 쌔서 '와, 일본은 이런 수위가 통과 되는 거야?'싶은 뜨악한 장면이 있어서 추천하긴 좀 그런 영화였습니다만, 어쨌든 영화 말하려고 하는 주제와 영화적 완성도가 좋아서 전 나쁘지 않게 봤습니다.


 영화에 주요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그런가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와타나베 켄'과 '아야노 고', '히로세 스즈'도 반가웠지만 특히 '츠마부키 사토시'와 '이케와키 치즈루'가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토시는 주연이니 그렇다 쳐도 진짜 엑스트라로 몇 장면 안 나오는 치즈루 님을 내가 캐치하다니... 그게 더 놀랐습니다.


 어쨌든 두 명을 보니까 이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케와키 치즈루 님이 '조제' 역으로, 츠마부키 사토시님이 조제의 남자친구인 '츠네오' 역으로 나왔던 아주 좋은 영화죠.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 오랜만에 다시 보고 감상문이나 좀 써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스틸컷 좀 구해볼 겸 네이버에 영화를 검색했습니다. 이 영화,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오고 한국에서 리메이크도 했더라고요. 


 애니메이션이 나온 건 이번에 알았는데 별 관심이 없어서 패스. 한국에서 리메이크 한 영화는 예전에 볼 기회가 있어서 슬쩍 봤던 기억이 납니다. 본 영화도 원래는 소설을 영화로 리메이크한 거니까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만, 여하튼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처럼 리메이크 한 영화는 좀 별로였습니다.


 색감과 화면은 아주 예뻤던 걸로 기억하는데 조제가 너무 수동적이고 힘이 없어 보여서, 영화의 결말을 볼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안 그래도 무지하게 가슴 아픈 결말인데 조제가 이렇게 불쌍해 보여서야... 뭐 그거 말고도 영화가 썩 맘에 들진 않아서 보다가 껐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네이버엔 영화 포스터가 재개봉 포스터로 올라와 있더라고요. 그 재개봉 포스터의 문구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세상에, "오랜만이야 조제, 잘 지내지?"라니. 다시 조제를 만나러 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네요.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바닷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이 영화의 제목은 조금 특이합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는 사람 이름일 거고, 호랑이와 물고기는 뭐야?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기가 힘든 단어의 나열입니다. 호랑이와 물고기는 영화의 주인공 '조제'가 보고 싶어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각각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다르죠.


 조제가 츠네오와 연인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동물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호랑이를 보죠. 조제는 호랑이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그럼에도 호랑이를 보고 싶어 했던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호랑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호랑이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호랑이'는 조제에게 세상을 상징합니다. 츠네오와 사귀기 전까지 조제는 담요로 꼭꼭 덮인 채 유모차에 실려 밖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할머니가 그녀를 숨기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시선과 불친절한 사회의 시스템이 무섭기도 했겠지요.


 (할머니의 그런 '과보호'가 다소 부정적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당시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장애를 가진 그녀를 사람들과 세상이 어떻게 보았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니 할머니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죠. 오히려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통해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요.)


 이제 평생을 곁에 있어주겠다 약속한 츠네오가 있으니 조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노력을 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동물원으로 가서 호랑이를 볼 용기를 낸 거죠. 그리고 호랑이를 보고, 꽤 무서워하지만 그래도 "별로 무섭지 않네."라며 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담요로 자신을 가리지 않고 당당히 얼굴을 내밀며 지내지요.


 영화의 제목을 차지하는 또 다른 단어는 '물고기'입니다. 물고기는 조제가 좋아하고 동경하고 또 되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 물고기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여행, 하지만 수족관은 문을 닫았고 그녀는 물고기를 보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떠난 여행 속에서 조제는 츠네오가 자신을 떠날 것임을, 그의 마음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바다를 보고 온천 호텔로 향하던 도중 '물고기의 성'이라는 모텔을 발견합니다. 조제는 그곳에서 묵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합니다. 


 그리고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게 되지요. 싸구려 러브호텔에서 만난 가짜 물고기들. 하지만 그것으로도 조제에겐 충분했습니다. 그녀에겐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자신이 가장 보고 싶었던 물고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보게 된 조제는 자신은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깊은 바닷속에서 용기를 내어 얕은 바다로 올라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츠네오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기 위해서. 이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고 츠네오가 사라지면 조개껍데기처럼 바닥을 굴러다니겠지만 그것도 괜찮다며 츠네오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지요.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오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예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땐 사랑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자가 떠나버린, 너무 현실적이어서 슬픈 사랑 이야기], 그 정도로 생각을 했지요. 


 이번에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생각은 [미성숙한 사람들 속에서 상처를 받아온 조제가, 아이러니하게도 츠네오의 동정에 가까운 사랑으로 인해 결국 구원을 받은 이야기]였습니다. 사랑에 초점이 가기보다는 조제의 자립, 구원으로 초점이 옮겨 갔지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조제를 향한 츠네오의 '감정'이 전보다 위태롭고 성실치 못해 보였습니다. 이미 몇 번 본 영화라서 결말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고 하기엔 츠네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읽어내기가 힘들었고, 둘의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 행복한 장면들보단 둘의 관계에 균열이 가는 장면들이 훨씬 더 많이 등장하더라고요. 그래서 둘의 2년에 가까운 열애가 다소 미성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성숙'을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속 조제의 할머니가 맡은 역할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겉으로 보면 조제의 할머니는 장애인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조제를 숨기고 없는 사람 취급하려 하지요.


 하지만 감독은 할머니를 사회의 시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만 쓰지 않습니다. 영화의 결말을 주인공들에게,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지요. 마치 그리스 신화 속의 바로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신탁'처럼 말이죠.


 그러한 신탁은 할머니를 통해 끊임없이 츠네오와 조제에게 내려집니다. 츠네오에게는 "절대 너는 조제의 장애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니, 그녀와 만나는 것을 포기하라."라고 말하고, 조제에게는 "장애가 있으니 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하려 하지 마라."라고 경고하지요.


 츠네오가 할머니의 경고를 넘어 조제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하고 끝내 사귀게 되는 큰 이유는 그가 미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제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다소 미성숙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조제 역시 아직 성숙한 사람이라고 보기엔 조금 어려워 보입니다만, 다른 등장인물에 비하면 굉장히 성숙해 보이긴 하죠.


 영화 속의 다른 등장인물들은 덜렁되고 충동적이고 야만적이며 방탕하고 무례하지요. 마작방의 주인, 마작을 치는 사람들, 조제의 이웃에 사는 변태 아저씨, 카나에, 심지어 츠네오 역시 딱히 다르지 않습니다.


 츠네오는 처음 조제를 만났을 땐 호기심의 감정을 가지는 듯 보입니다. 동시에 마작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조제의 정체를 궁금해해서 혹여나 조제가 그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그녀와 자주 만나면서 그녀를 지켜주기도 하지요. 


 어쨌든 츠네오는 조제와 점점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가 가졌던 호기심의 감정은 관심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몇몇 사건으로 인해 그는 조제와 만날 수 없게되고 한 동안 그녀를 잊으려 노력하지요.


 그러던 어느날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조제가 힘들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제를 향한 츠네오의 감정은 '동정'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조제의 말에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녀의 연인이 되지요.


 츠네오의 감정은 사랑으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미성숙하기에 장애인인 조제를 동정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착각해 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설령 신탁이 옳다 하더라도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수많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 그는 조제를 향한 마음을 점차 잃어갑니다.


 마침내 조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츠네오는 자신의 동생의 입을 통해 '형, 지쳤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여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감정을 깨닫습니다. 조제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닌 조제에게 [지쳐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죠.


 반대로 조제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설령 츠네오와 친구, 연인 사이가 되더라도 언젠가 그와 헤어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 한 대목을 읽으면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사랑이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그를 받아들입니다. 


 왜냐면 조제에게 츠네오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거든요. 츠네오에게 조제는 단지 감정의 대상입니다. 조제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와 사귀게 되지요.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조제에게 츠네오는 감정의 대상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입니다. 츠네오가 없다면 혼자 남은 조제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힘들었을 테고, 세상과 격리돼서 살아온 그녀에게 비슷한 나이대의 멀쩡한 남자를 만나는 것 역시 힘들었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영화는 슬프게도 둘의 행복한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둘의 첫 섹스와, 이어지는 동물원에 간 짧은 시퀀스를 제외하고는 둘의 사랑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합니다. 망가져서 다신 고칠 수 없다는 유모차와 차가운 츠네오의 말투, 그리고 행동. 츠네오는 그런 것들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조제는 그것들을 느끼고 있지요. 


 마침내, 츠네오의 마음이 자신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서 조제는 그를 보내줄 마음을 먹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조제가 여행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온천 호텔이 아닌 '물고기의 성'이라는 이름의 싸구려 러브호텔이었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 그 여행의 끝에서 조제는 물고기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야한 섹스'를 끝내고 나서 츠네오는 불을 끕니다. 불이 꺼지는 순간 호텔방은 푸른색을 띠면서 마치 바닷속처럼 변합니다. 그리고 빛으로 된 물고기가 헤엄을 치지요. 조제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행복해하고, 동시에 츠네오를 보내줄 마음을 먹습니다. 


 자신이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을 본 조제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성숙과 미성숙함,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조제는 비로소 영화의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제 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 더 이상 그를 자신의 옆에 둘 수 없기에 그를 자기 곁에 더 잡아두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조제는 츠네오와의 헤어짐을 결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게서 삶을 살아갈 용기, 구원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설령 츠네오가 떠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갈 것임을 다짐합니다.


 너저분한 러브호텔에서 그저 빛에 불과한 가짜 물고기를 보며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저런 너저분한 것이 구원이야?'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너저분한 호텔, 가짜 물고기, 미성숙한 츠네오의 동정에 가까운 사랑 속에서도 조제는 어쨌건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어느 때, 어느 순간에나 존재합니다. 다만 그것을 찾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조제는 다소 '어설픈 것들' 속에서 자신만의 구원을 찾아내고 받아들였습니다. 


 훨씬 더 아름다운 상황에서 조제가 자신의 구원을 찾았다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구원은 하필 그 때, 그 장소였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제가 받은 구원의 메세지가 어설프거나 너저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느낀 구원의 메세지는 그 어느것보다 강하고 크고 밝은 것이었으니까요.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끝에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담백한 이별이었지요. 정황상 츠네오는 환승이별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새 여자친구 카나에와 길을 걸어가다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사실 그와 조제는 담백하게 헤어진 것이 아니죠. 그는 조제의 곁을 도망쳐 나왔고, 조제는 그를 놓아준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츠네오는 자신의 미성숙함을 깨닫고 참회, 비극적 결말에 대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죠. 할머니를 통해 그에게 내려진 신탁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씬에 조제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휠체어를 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츠네오가 자신을 업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러면 그가 자신을 떠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쓸쓸해 보이지만 전동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모습을 가리지 않은 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조제의 모습에서 '조제는 이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겠구나.' 하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츠네오를 위로해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너무 아파하고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너 덕분에 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니까.' 그렇게 조제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조제'이고 그녀는 츠네오에게서 혼자서도 세상과 마주하며 살아갈 용기라는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아직 조제에게 내려진 신탁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전동 휠체어를 타더라도 걸어 다니는 사람들보단 빠를진 몰라도 그래도 자동차보단 느리기에, 자전거조차 추월할 수 없이 느리게 다녀야 하기에. 설령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꿋꿋하게 혼자 모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쿵! 소리를 내며 부엌 바닥으로 다이빙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일들이 분명 그녀에게 있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제는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과 계속 맞서 싸울 것이고 그것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고 성숙한 사람이기에, 그래도 그녀의 삶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래서 마지막 시퀀스에 나왔던 조제의 담담한 모습과 쿵! 하는 소리가 더욱 가슴 아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전 영화를 보고 나서 왓챠에 별점을 매기고, 가끔 한줄평을 남기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왓챠에 내가 별점을 몇 점 줬더라, 하고 들어갔다가 이 영화를 혹평하는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경악과 함께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까 불편한 설정이 좀 많이 있긴 했지." 하는 동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모든 예술 매체들이 그렇듯, 이 영화를 읽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조제와 츠네오의 풋풋하고 아슬아슬한 사랑이야기에 집중했을 테고, 누군가는 조제를 보며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츠네오를 보면서 연민을 느껴 그에게 응원을 보낼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불편한 영화 속의 몇몇 설정들 때문에 이 영화를 싫어하실 수도 있겠죠.


 어느 방법이 맞다, 틀리다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이란 매체는 독자를 만나는 순간 일종의 화학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독자의 마음속에 남죠. 그래서 같은 영화를 100명이 보았다 하더라도 100가지의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오게 됩니다.


 설령 감독이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독자가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다른 어떤 이야기'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독자에게 그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다른 어떤 이야기'를 다룬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감독의 이야기는 독자와 만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그 독자의 마음 속에 남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예술이 가진 속성이자 매력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다른 어떤 이야기'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요. 그것이 잘 못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영화 속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영화 속 설정의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되서 영화가 마음에 닿기도 전에 영화 전체를 불편하게 보는 게 아쉽더라고요.


 영화나 소설, 음악 같은 예술 매체를 즐길 땐 그런 정치적 올바름을 내려두고 영화 속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보는 재미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작가의 이전글 명작 다시 읽기 – 토니 타키타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