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깊은 우물이라는 이름의 공허함
상실의 시대를 이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 더 소개하게 됐네요. 이번 작품은 그의 단편집 ‘토니 타키타니’를 영화로 한 ‘토니 타키타니’입니다.
대부분 원작을 기초로 한 두 번째 작품들은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원작에 비해 부족한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는 좀 달랐습니다. 원작 단편도 좋았고 주제도 아주 좋았습니다만, 제가 느끼기엔 영화가 말하고 있는 주제가 좀 더 명확하고 와닿았던 것 같네요.
영화의 연출이 좋았다,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달리 할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아, "감독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았기에 오히려 완벽해질 수 있었다"라는 표현이 제 생각에 부합할 것 같네요.
"그에게 있어 '감정'이란 비논리적이고 미성숙한 것일 뿐이었다."
토니 타키타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주인공인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인 쇼자부로는 트롬본을 부는 연주자였습니다.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얽매임 없이 살아가던 그는 상하이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재즈 밴드를 합니다. 밴드를 하면서 좋지 않은 친구를 만나서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어찌어찌 살아서 일본으로 귀국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도쿄대공습으로 자신이 살던 집과 가족은 이 세상이 아닌 상태. 그는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지만 아내는 아들을 놓고는 죽어버립니다. 아들이든 아내에게 큰 정이 없던 그는 친한 미군 장교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토니 타키타니라고 짓습니다. 앞으로는 미국의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이 커가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역할은 제대로 하지 않고 트롬본을 불러 나가고 토니는 외로운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냅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인간이나 풍경을 그리는 것보다 딱딱한 메카닉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겼고, 덕분에 큰돈을 벌었지만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다른 것엔 별 관심이 없는 건조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운명적인 여자 에이코를 만나게 되고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게 된다, 는 것이 영화의 초반부 줄거리라 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하늘을 나는 새가 바람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영화는 처음 언급했다시피 감독이 자신의 욕심을 많이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영화입니다. 그리 유명한 감독이 아니고 그의 전작들도 한국에서 유명한 작품들이 몇 없어서 그의 영화적 색채를 왈과 왈부하는 것이 조금 실례이지만, 이 작품만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있는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보다는 [하루키의 단편을 말 그대로 ‘온전하게’ 영화로 옮기고 싶다]라는 느낌이 더 드는 것 같습니다.
하루키 문체 특유의 드라이함과 쿨함, 묘하게 현실과 상상을 왔다 갔다 하는 주인공과 그 인물들의 느낌을 몽환적으로 잘 묘사를 했지요. 색감도 회색빛, 전체적으로 뿌연 안개 같은 화면을 만듦으로써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영화의 연출, 이라고 해야 할까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 역시 훌륭합니다. 몇몇 대사나 지문은 마치 주인공들이 단역극을 하는 것처럼 직접 읽음으로써 영화를 본다기보다 하루키 문학의 낭독회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른 영화라면 이러한 연출이 어울리지 않았겠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편집이 완벽하게 어울렸습니다.
원작 단편 소설에 대한 존중, 또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감독의 역량이 훌륭한 영화이지요.
"고독이란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또 한 가지 무조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ost를 무려 '류이치 사카모토'가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모든 ost를 좋아하지만 특히 'Solitude'를 저는 너무 좋아합니다. 영화 특유의 음울함, 쓸쓸함을 극대화시키는 음악이라고나 할까요.
잠시 영화 이야기를 접어두고 사카모토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카모토의 음악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뭐랄까 그의 음악은 청자들을 위해 공백을 남겨둔다고나 할까요. 기본적으로 느린 템포의 음악을 주로 만드셨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음악을 가득 채우지 않습니다. 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넘어갈 때 있는 묘한 빈 공간에 제 생각을 불어넣어 채움으로서 노래와 제가 공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다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공백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화 ost의 빈 공간을 토니 타키타니를 비롯한 인물들의 감정들로 채워버립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이 영화의 ost를 들어도 그곳엔 제가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토니 타키타니를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이 아직도 그 안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지요.
영화의 ost가 이렇게까지 좋았던 것은 너무 오랜만인 것 같네요.
"뭐랄까, 옷이라는 게 제게 없는 어떤 부분을 채워주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 영화는 전에 ‘노르웨이 숲’ 리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모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깊은 우물이라는 이름의 공허함.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우물을 어떻게 꾸미고 또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시 영화의 줄거리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먼저 토니의 아버지 '쇼자부로'부터 생각을 해보죠. 그는 텅 비어 있는 인간입니다. 그 빈 공간을 어떻게 채울지 몰랐지요.
특히 그는 상해에서 동료들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음악의 상실로 인해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다시 찾았으나 가족들은 폭격으로 인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죠. 그래서 쇼자부로는 새 가족, 즉 결혼을 하고 아이도 생겼지만 가족의 안락함은 그의 우물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 트롬본을 불러 밖으로 나갑니다. 그의 우물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이었죠.
토니의 아내, '에이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죠.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있지만 토니의 적극적이고 솔직한 구애로 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결혼 전에도 자신은 자기가 번 돈을 모두 옷을 사는데 써버린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토니는 당연히 그것을 웃어넘겼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정말로 옷을 사는데 모든 돈을 써버리는 사람이었죠.
그녀의 옷과 구두, 백이 점점 많아지자 심지어 토니는 그녀를 위해 큰 방 하나를 의상실로 줍니다. 그 의상실도 그녀의 옷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고, 결국 파국으로 향하게 되죠. 그녀 역시 마음에 깊은 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방법은 옷을 사는 것이지요.
영화의 중반부, 에이코는 구매한 옷을 환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해 죽습니다. 토니는 아내가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녀가 남기고 간 옷들을 정리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천천히 잊어가기 위해 아내와 똑같은 사이즈를 가진 여자를 비서로 고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적합한 여자를 구하고, 다소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일을 하는 내내 아내가 남기고 간 옷을 입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자는 토니의 안내를 따라 에이코가 남기고 간 옷이 남아있는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황홀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오만가지 브랜드의 비싼 옷과 백, 구두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녀는 옷을 입어보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좋은 옷들을 남기고 죽는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자신은 알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하며 말이죠.
그런 그녀를 보내고 토니는 혼자 생각을 하다가 그녀를 고용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전화를 걸어 입은 옷은 가져도 좋으나 남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지요. 그리고 업자를 불러 그녀의 물품을 모두 가져가게 합니다.
이후 그의 아버지 쇼자부로가 죽습니다. 쇼자부로는 돈을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레코드를 그에게 남겨주었죠. 레코드 판을 에이코의 옷이 가득했던 자신의 빈 방에 둡니다. 하지만 레코드 판들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웠던 토니는 이번에도 업자를 불러 그것들을 정리합니다. 마침내 그의 방은 텅 비게 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올라옵니다.
이번에 토니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외톨이가 되었다, 라고.
이 영화에서는 [마음속의 우물]을 토니의 방으로 표현을 합니다. 아버지 쇼자부로의 우물을 채워두었던 음악, 에이코의 우물을 채워주었던 옷가지가 그의 방을 채웠습니다만 그 어느 것도 그의 마음속의 빈 방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올린 구인공고를 보고 찾아온 여자가 에이코가 남기고 간 옷을 보고 울음소리로 그 방을 채웠을 때도 그는 자신 속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다만 영화의 후반부에 자신에게 남아있는 서류들을 다 태워버렸음에도 그녀의 사진과 전화번호를 태우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가 대답 없이 다시 끊어버리죠.
토니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 한 것은 그녀가 토니의 마음속 빈방을 '감성'으로 채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는 그의 상실감이 채워졌다고 느낀 것이죠.
다만, 이제 다시 누구를 사랑할 자신도 없고 그녀에게 부담을 줄 수도 없었기에 전화를 걸었다가 끊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나는 고독 속에서 살겠다"라는 결심이 담긴 의미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래서 토니는 정말로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이죠.
결국 토니의 마음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음악으로 대변되는 예술도, 옷으로 대변되는 돈도 아니고 가족의 정이나 사랑도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인 ‘공감’이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영화는 하루키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볼 수 있는 잘 만든 영화입니다. 극적인 사건이 별로 없고 하루키 특유의 독특한 상상력에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재미있게 보기는 좀 힘든 영화이긴 합니다.
다만 재미는 다소 떨어질 수도 있지만 하루키 특유의 쓸쓸한 느낌을 감독과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극대화시켜 주는 명작이지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감독이 참 똑똑하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은 이 작품 이후로 몇 작품 더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참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다른 작품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래서 ‘상실의 시대’ 영화도 이 감독이 이런 느낌으로 만들었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장편소설을 이런 식으로 영화화 하긴 힘들었겠지만 영화 ‘상실의 시대’는 뭐랄까요, 하루키 문학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느낌이었달까 저는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그런 연애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면 굳이 노르웨이의 숲을 가지고 오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말이죠.
책을 읽는 기분을 영화를 보면서 느끼고 싶으시다면,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류이치 사카모토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망설일 필요 없이 필견해 야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