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로맨스 코미디로 넘기기엔 아쉬운, 생각보다 굉장히 영적인 영화
가끔 옛날 외국 영화들을 보면 원제와 한국 개봉 타이틀이 달라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제멋대로 지은 영화의 제목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제목을 만들거나, 원제가 생소해서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친숙한 내용으로 바꾸거나, '이것보단 이렇게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자기 멋대로 바꾸는 경우가 있었죠.
때론 그런 영화 제목들이 찰떡같이 달라붙어서 좋은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좋은 결과를 얻기가 힘들죠. 이 영화는 위에 언급한 두 번째 사례인 '한국인에게 생소해서 어쩔 수 없이 제목을 바꾼'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바로 '사랑의 블랙홀', 원제는 'Groundhog day'이지요.
'그라운드호그데이', 일명 '성촉절'은 한국인에겐 친숙한 문화가 아니니 원제를 창작에 가깝게 뜯어고친 건 이해할 만 하지만, 뭔가 성의 없이 지은 3류 코미디 영화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영화 제목만 보면 시답잖은 킬링타임용 3류 코미디 영화 같지만, 이 영화는 생각보다 심오하다면 심오한 주제와 교훈을 담고 있는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처음 볼 땐 그냥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지만 다시 보니 영적인 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TV 방송국에서 기상 리포터로 일하는 '빌'.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시니컬한 사람입니다. 그런 빌과 정반대 되는 '리타'라는 직장 동료이자 신인 프로듀서가 있습니다. 그녀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긍정적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입니다.
두 사람과 카메라맨 '래리'는 '성촉절' 취재를 위해 깡촌인 '펑서토니'로 향합니다. 빌은 투덜거리고 그런 빌을 달래면서 어떻게든 촬영을 무사히 마친 리타와 래리는 빨리 펑서토니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빌을 위해 피츠버그로 향합니다.
하지만 눈이 오지 않는다는 기상예보와는 달리 폭설이 내리면서 도로가 막히게 되고 세 사람은 펑서토니로 돌아오게 됩니다. 투덜거리며 잠을 청하는 빌. 그리고 다음날 빌은 아침에 일어나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초반부 줄거리라 할 수 있겠네요.
이제 이 영화가 왜 단순한 코미디 영화가 아닌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영화에서 하루가 반복되는 '루프'라는 설정은 마치 불교의 '윤회'를 연상케 합니다. 윤회는 인간이 죽고 나서 다시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니 완벽한 동의어는 아니지만 '반복되는 삶은 고통'이라는 메시지는 동일하기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선 인간이 죽고 나면 하늘나라, 즉 천국에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고통도 고민도 없고 행복만이 가득한 곳이지요. 불교에선 조금 다릅니다. 기독교에선 죽으면 땡이지만 불교에선 '환생' 혹은 '윤회'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인간은 죽고 나면 이번 생에 어떤 업보를 쌓았는지에 따라 동물이나 식물, 광물로 태어날 수 있고 선한 업을 잘 쌓은 사람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불교의 최종목표는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라는 업보를 끊어내는 것이 최종 목표이죠. 윤회의 업보, 즉 태어남과 죽음의 반복되는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열반'입니다.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자신의 모든 욕정을 내려놓고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달아야 하지요.
빌은 성촉절이 반복되는 하느님의 '징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빌은 교만한 사람이었거든요. 기독교엔 '칠죄종'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죄에 근원이 되는 7가지 사유이지요. 나태, 성욕, 탐욕, 질투, 인색, 분노, 그리고 교만입니다.
이 칠죄종 중 가장 큰 죄는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신의 권위에 도달하려는 순간, 나머지 6가지의 죄를 쉽게 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큰 벌을 내리는 상황에선 대부분 인간의 교만에 대한 징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교만'하였기에 하루가 반복되는 '윤회'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윤회 속에서 리타와의 사랑을 꿈꾸게 되죠. 빌은 리타의 사랑도 얻기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이니,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낼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이죠.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리타가 꿈꿔왔던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리타는 이야기합니다. "당신처럼 당신밖에 모르는 사람과는 사랑을 할 수 없다."고요.
드디어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의 고통을 깨닫게 된 빌은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빌이 자신의 교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고 솔직하게 리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었을 때, 그에겐 한 줄기 희망이 내려옵니다.
리타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아도 리타는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빌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없고 다시 성촉절이 반복됩니다.
아직 신(The god)은 그에게 윤회라는 형벌을 끝내줄 생각이 없었거든요. 빌은 교만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고, 선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태껏 선하게 살아온 리타에게 '완벽해진 빌'이라는 선물을 주려는 신의 의도도 슬쩍 보이는 듯하죠.
빌은 이제 리타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기에, 그는 친절한 사람이 되려 합니다.
빌은 자신이 하루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함을 베풉니다. 그리고 노숙자 노인의 죽음을 목격하곤, 그를 살리기 위해서 오만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빌은 리타에게 이야기했었죠. "나는 신(A god) 같은 거라고. 하느님(The god)은 아니지만..." 그 순간 빌은 깨닫습니다. 자신은 신이 아니고, 벌을 받고 있는 인간에 불가하다는 것을 말이죠. 빌이 자신의 교만에 대한 징벌을 마주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리타와 같은 선한 사람이 되었을 때, 빌은 비로소 반복되는 성촉절이라는 벌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더 이상 교만한 사람이 아닌 친절하고 다재다능한 빌이 되어있었으니까요.
즉 이 영화는 '교만'에 빠져있던 빌이 하루가 반복되는 '윤회'라는 벌을 받아, 그 속에서 교만이라는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고 자신을 내려놓는 '열반'의 과정을 거쳐 리타의 사랑이라는 '구원'을 받게 되는 굉장히 영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와 불교의 설정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로 잘 녹여낸 굉장한 수작이지요.
사실 이 영화 소개글을 써볼까 마음을 먹었을 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워낙 많이 본 영화여서 '굳이 이걸 다시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아, 너무 옛날 코미디 영화여서 보기 지루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거든요.
옛날에 써놓은 글이 있어서 그걸 참고해서 써볼까 하다가 부활절 휴일이라 시간이 좀 남더라고요. 밤에 와인 한 병 마시면서 영화를 봤는데 루프가 시작되는 씬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니 옛날과는 다른 점들이 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전에 봤었을 땐 영화 내의 메시지에 덜 집중하면서 봤었는데, 이번엔 은근히 그런 영적이랄까 신학적인 메시지가 꽤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오늘이 바로 내일이에요."라고 말하며 감격한 빌의 모습이 조금 더 다채롭달까, 다각적으로 보였습니다.
굳이 저처럼 교만이라던가, 윤회라던가, 열반이라던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로맨스 코미디 영화로 봐도 아주 괜찮은 작품입니다. 영화 표면에서 보이는, '완벽하게 계획된 솔직하지 않은 하루보다 어설프지만 솔직한 하루가 더 낫다.' 정도의 메시지를 생각하고 봐도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죠.
무엇보다도 리타 역의 앤디 맥도웰 누님의 외모가 아주 빛나서 빌에 감정이입해서 보기 참 좋았습니다. 여성분들은 빌 머레이를 보면서 리타에게 감정이입이 되실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의 두 주인공은 관객이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나 관객들이 주인공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의 색다른 매력이 아주 넘쳐서 영화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 영화는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든 일단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인, 그냥 웃기고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웃기고 재미있고 가벼운 영화주제에 깊게 생각해 볼 만한 메시지를 숨겨놓은, 아주 빌 머레이 같은 능구렁이 같은 영화죠.
여태 명작이랍시고 좀 꿀꿀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많이 소개했던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아주 재미있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고전 명작 영화이니 한 번 기회가 되신다면 꼭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