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는가
요즈음 일상이 바쁘다 보니 주말에는 쉬고 싶고, 그러다 보니 주일미사를 좀 많이 빼먹었습니다. 성당 피정 준비를 하다 보니 평일에 성당을 자주 가게 돼서 성당에 아예 안 간 것도, 미사를 아예 빠진 것도 아닙니다만... 그래도 가톨릭 신자된 입장으로선 주일미사를 빼먹는 게 마음에 많이 걸리더라고요.
최근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주일미사를 나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지난주 주일엔 전날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피곤해서 성당에 도저히 못 가겠더라고요.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결국 성당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때마침 전례봉사 한 자리가 펑크가 나서 제가 대타로 들어갔고, 무사히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전례봉사를 몇 달 만에 하다 보니 감흥이 좀 남다르더라고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불현듯 한 영화가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마틴 스콜세이지 옹께서 찍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가톨릭에 대한 영화였던 것 같은데...' 하다가 이 영화를 찾았습니다.
'사일런스', 침묵이라는 영화죠. 영화를 보기 전에 네이버에서 정보를 찾아봤는데 낯이 익은 분의 소설이 원작이더라고요. 바로 '엔도 슈사쿠'라는 일본의 소설가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일본의 가톨릭 박해와 박해 속에서의 신자들의 신앙을 다룬 영화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나의 예수'라는 책을 전에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초월자로서의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닌, '인간이었던 예수가 어떻게 초월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으로 읽으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를 본 김에 원작 소설도 읽어봤는데 둘 다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접근하는 것과 끝까지 보는 것이 좀 쉬웠고-러닝타임이 2시간 40분인 점은 제외하고-책은 읽기는 힘들었지만 좀 더 깊은 이야기, 로드리게스 신부의 고뇌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개신교 단어로 번역이 된 건 좀 아쉬웠지만, 그런 사소한 점을 제외한 전반적인 번역도 굉장히 훌륭했고요.
개인적으론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어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이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 내에서 예수를 믿는 일본인들을 '키리키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데요. 기독교는 본래 가톨릭과 개신교를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지만 한국에선 기독교라는 단어가 개신교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기 때문에, 이 글 내에선 시대상을 고려해서 '가톨릭'이라는 말로 분리해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영화의 대사를 받아 쓰는 것이 어려워서 소설 원작을 참고해서 대사나 상황을 적었습니다. 원작과 영화의 이야기가 초반부와 결말부는 약간 다른데 큰 줄기는 같고, 어쨌든 영화의 내용을 위주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큰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는 니암니슨이 분한 '페레이라'라는 신부의 시선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17세기 경,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포르투갈의 신부입니다. 처음엔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던 일본은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가톨릭신들의 반란으로 인해 가톨릭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신자들과 신부들에게 배교를 강요했고, 배교하지 않는다면 온갖 잔인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그런 과정에서도 신자들과 함께 신앙을 지켰지만 어느 순간 그는 교회와 연락이 끊어지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가 결국 배교를 했고, 그곳에서 결혼해서 아내와 자식까지 있다는 이야기였죠.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고 그를 존경했던 앤드류 가필드가 분한 '로드리게스' 신부와 아담 드라이버가 분한 '과루페' 신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고, 페레이라 신부를 찾는 동시에 일본에 선교를 하겠다며 선교사를 자원합니다. 하지만 많은 신부들을 일본에서 잃었기에 교회에선 그들의 자원을 반려합니다만 두 신부의 열정에 교회는 마지못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지요.
일본으로의 정상적인 입국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두 신부는 마카오를 통해 일본으로 밀입국을 시도하고, 둘을 도와줄 일본인 '기치지로'를 마카오에서 만납니다. 두 신부는 항상 술에 취해있고 정상이 아닌 것 같은 기치지로를 반신반의합니다만 그가 신자이며 일본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그를 만난 것도, 그에게 의지해야 하는 것도 신의 뜻이라 생각한 두 신부는 그와 함께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일본 땅에 도착한 기치지로는 신부들을 두고 도망을 가고, 신부들은 당황합니다만 운이 좋게도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지 애매모호한 사람들이었지만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두 신부는 큰 감동을 느낍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부들을 극진히 대하면서도 '이노우에'라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며 이야기하지요.
영화의 시선은 주인공인 로드리게스 신부를 따라가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2명 더 등장합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기치지로와 이노우에이지요.
기치지로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죽는 것이 두려워 성화를 밟고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배교를 거부했기에 혼자 살아남고, 그로 인한 죄책감에 기치지로는 마카오에서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지요. 신부들도 처음 그를 봤을 땐 '이자가 정말 신자가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추후 그의 행동으로 볼 땐 그는 신자가 맞습니다. 다만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목숨을 위해 수시로 배교를 하고, 나중엔 신부를 막부에 팔아 넘기기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성경 속의 유다처럼요.
영화 속의 기치지로는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기치지로의 최후를 보고 나면 '신앙인으로서 내가 기치지로보다 나은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죠.
배교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누가 영화 속의 순교자들처럼 자랑스럽게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아마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기치지로처럼 성판을 밟고 십자가에 침을 뱉고, 성모나 예수를 욕하겠지요. 그리고 신앙을 내려놓고 살아가겠지요. 죽는 것이 두려우니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기치지로는 그런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로드리게스 신부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로드리게스를 막부에 밀고해 은 300냥을 받은 이후에도 신부가 갇힌 감옥에 와서 고해성사를 받으려고 하지요. 고해성사란 자신이 지은 죄를 신부에게 털어놓고, 신부의 보속이라는 일종의 '반성의 숙제'를 받고 그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가톨릭의 절차입니다.
기치지로가 진심으로 반성을 하고 고해를 했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고해를 위해 신부를 계속 찾아오는 그의 행동 자체가 저에게 꽤나 와닿았습니다. 스스로도 이야기하듯 기치지로는 '시대를 잘 못 태어나 배교를 해야만 살 수 있는 약한 인간, 가톨릭 탄압이 없는 시대에 살았다면 신앙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갔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에게 신앙심이 없었다면 신부를 팔아넘기고 나서 다시 그를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고해를 하겠다는 마음도 먹지 않았겠지요. 또한 영화의 끝에 기치지로는 목숨을 잃습니다. 성화를 밟는도 중, 보자기에 싸서 목에 걸어두었던 성화를 들켰기 때문이죠.
후에 신자들을 위해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게스 신부는 죽을 때까지 성물을 몸에 지니지 않았고, 푸른 눈의 일본인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기치지로는 달랐죠. 그와 신부가 가진 신앙의 무게가 달랐을지언정, 그의 신앙심 역시 진심이었던 것이죠. 다만 다른 순교자들처럼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강하지 않은, 우리와 같은 소시민일 뿐.
영화를 보는 내내 못난 사람이었던 기치지로가 영화의 끝에선 오히려 '내가 저 기치지로보다 나은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죽음 앞에선 겁을 먹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자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에게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계속 실패하지만, 어쨌든 마음만은 진심이었던 썩 흥미로운 사람이었지요.
다음은 이노우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영화의 악역이지요. 그는 선량한 얼굴을 가진 노인입니다. 소설에선 원래 신자였지만 배교를 하고 신자들을 잡으러 다니는 악랄한 관리로 나오지만, 영화에선 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노우에는 신자들을 혹독하게 대합니다. 참아내기 힘든 고문을 가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죽이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노우에를 단순한 악역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진 악당으로 표현하지요.
이노우에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불교라는 종교를 이미 가지고 있고, 당신의 가르침은 이 땅에 선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는 추녀의 구애를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그걸 받는 것조차 힘듭니다. 이 땅에선 당신의 종교가 뿌리내려서 살지 못합니다. 석녀-불임 여성-처럼 말이죠."
굉장히 과격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분하고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하며 로드리게스 신부를 설득합니다. 그리고 신부를 압박하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신자들을 처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신부들이 배교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니, 우린 당신을 배교시키기 위해 저들을 고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노우에의 행동에서 신앙에 별 관심이 없는 분들은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은 잘 못 되었을진 몰라도 하는 말은 맞지. 굳이 원하지 않는데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불편하고, 심지어 예전에 반란까지 일으킨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아?"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남이 굳이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날 가톨릭이 행해왔던 강요에 가까운 선교활동을 곱게 보진 않습니다.
이노우에의 탄압은 신자들 입장에선 고통이지만, 보통의 일본인들에겐 전통을 파괴하고 서양인들에게 영혼을 넘긴 배신자들에 대한 통쾌한 응징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로드리게스 신부는 당연하게도 예수의 가르침과 그 사랑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는 일본의 키리키탄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신부는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습니다. 예수의 모습으로 말이지요.
반대로 이노우에로 대변되는 일본 막부 입장에선 가톨릭신자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니 이미 터져버린 폭탄과 같은 존재입니다. 박해를 이유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언제 또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죠. 또한, 이미 일본에선 불교라는 종교가 있는데 굳이 가톨릭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고요.
이러한 대립한 두 세계의 충돌에서 영화는 영리하게도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악역의 포지션인 이노우에를 마냥 악하게만 그리지 않기에 어느 쪽이 잘 못 되었는지, 어느 쪽이 정답인지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전 영화의 이런 중립적인 태도가 좋았습니다. 관객들을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설득하려 하지도 않지요. 영화는 이런 중립적인 시선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권리, 그리고 스스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신앙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줍니다.
영화의 제목이자, 종교인이라도 항상 고민을 할 '침묵하는 하느님, 신'에 대한 이야기이죠.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예수가 존재하고 그가 성경에 있는 것처럼 전지전능하며 자애로우며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그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짖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가? 왜 침묵하며 방관하는가?"
영화에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냇가의 물을 마시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예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은화 30냥에 팔아넘긴 유다처럼 곧 기치지로가 자신을 팔아넘길 거라는 예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예수가 앞으로 신부에게 닥칠 수난을 걱정해 용기를 준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얼굴을 가진 아들아. 어떠한 행동을 하든 너는 나의 얼굴을 가졌으니, 설령 그것이 나를 배신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결정에 힘들어하지 마라."라고 로드리게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끊임없는 고뇌 속에서 신부는 애타게 신을 향해 기도합니다만, 신은 끝까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결국 견디기 힘든 신자들의 고문을 보고 나서야, 그는 배교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 그것 역시 하느님, 즉 예수의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낡아빠진 목판에 새겨진 엉성한 예수의 얼굴, 그것을 밟으려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신부는 비로소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요.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라고요.
하느님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게스는 영화의 끝까지 철저히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일본인으로 살아갑니다. 페레이라와 마찬가지로 부인과 아이를 받아 그들과 함께 살다가 죽게 되지요.
소설에선 배교 후에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는 로드리게스를 찾아온 기치지로에게 어쩔 수 없이 고해를 해주고 자신이 했던 일-배교-또한 예수의 사랑이라며 마무리를 짓지만 영화에선 한 이야기를 더 붙이고 마무리를 합니다.
결국 일본에서 죽은 로드리게스는 절에서 불교식 장례를 치릅니다. 그는 작은 원통에 뉘어지고 그의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있죠. 혹시나 모를 잡귀가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그가 죽어서도 신자로 죽지 못하게 할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로드리게스의 시신을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무언가를 넣어줍니다. 이윽고 절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불경 외는 소리와 함께 화장이 되죠.
영화는 불타는 시신의 모습과 함께 그의 손을 클로즈업합니다. 그곳엔 처음 도착한 작은 어촌마을의 사람에게서 받은 엉성하게 조각된 십자고상이 칼과 함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마틴 옹께선 고생한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안식을 주고 싶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의 진심을 알았던 아내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점에서도 감동적인 마무리였습니다.
소설의 마무리는 이런 로드리게스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의 배교가 하느님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만 했던 일이라는 메시지가 조금 더 강렬했기에 소설의 결말도 좋았지만 전 그래도 영화의 결말이 조금 더 좋았습니다.
죽어서라도 안식을 얻은 신부의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어찌 되었건, 전 해피엔딩이 좋으니까요.
종교에서 숭상하는 절대자인 신의 침묵에 대한 문제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유효합니다. 신학자도, 종교인도 아닌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감히 다룰 만한 주제가 아니지요.
이 영화와 책을 보기 전까지는 신은 침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워낙 바쁘신 분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당신의 모습이 아닌 주변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행동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신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부르심에 침묵하는 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애로운 마음을 갖지 않고 세상을 살고, 남을 대하는 것. 그것은 신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침묵하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끝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하느님이 침묵하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신 때문에 목숨을 건 일반 신자들의 기도에는 왜 그분은 끝까지 응답지 않고 침묵하셨을까. 영화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일본의 신자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기도에는 침묵하셨나?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혼란스러웠거든요.
이 이야기는 영화이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로드리게스와 페레이라 신부의 모티브가 된 인물도 존재하고, 한국에서도 가톨릭을 박해한 비슷한 역사가 있기에 저에겐 훨씬 크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많은 순교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지켰을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처럼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배고픔도 노역도 세금도 없는 천국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니까, 그래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이렇게 죽는 것 또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쁘게 목숨을 내놓았을까.
그들이 기쁘게 목숨을 내놓았다면 그건 하느님이 응답해 주신 것이지만, 그중에선 "왜 당신의 길을 따르려는 나를 죽이고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저들에겐 벌을 내리시지 않습니까?"라며 그분의 침묵에 절규한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런 사람들의 기도엔 왜 응답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들의 신앙이 부족했거나 악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랬을까요.
비단 순교자들이 아닌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나 고난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그때의 시련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자양분이 되었다고 웃으며 말하니까요.
하지만 그 시련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삶이나 몸이 망가졌거나, 혹은 목숨을 잃었다면 이러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겠죠. '그때 왜 나를 구원해주지 않았나, 왜 그 사람을 구원해주지 않았나. 당신이 신이라면,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가?'라는 절규를 신에게 내뱉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 어려운 문제이고, 제가 비슷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니기에 영화를 보고 나서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원작을 읽었는데, 그 후에도 답을 내리기가 어렵더라고요. 다만,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잘 못 된 건 아니니까. 좀 더 고민하고 묵상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예전에 신부님께 민감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제가 신자 된 입장으로 이런 질문을 하기가 좀 그런데요..."라고 운을 떼고 질문을 드렸더니 신부님께선 "신앙 생활 하시면서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 건 당연합니다. 그만큼 애정이 있으시고 알고 싶으시니까요."하고 먼저 말씀을 하시고 제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그 이후로는 좀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신앙에 대한 의문을 품고 신부님이나 수녀님께 의문들을 여쭙곤 합니다. 때에 따라 더 애매모호한 답변을 얻을 때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의 답변을 받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이런 생활이 저는 재미있고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의문을 버리지 않고 마음 한편에 두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선하게 살다 보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날이 언젠가 오겠지요. 좀 흔들리긴 했어도, 그래도 여전히 저는 하느님은 침묵하시지 않고 다른 방법을 통해 저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