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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윈 Dec 09. 2023

명작 다시 읽기 - 노르웨이의 숲

먼저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남겨진 사람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전 무라카미 하루키를 아주 좋아합니다. 하루키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이 추천해 준 ‘해변의 카프카’가 제가 읽은 하루키상의 첫 작품이었죠.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고 “와, 책을 이렇게 재밌게 쓰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라는 생각과, “왜 이 책을 나한테 추천해 준 거지..?”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 같네요.


 하여튼 술술 넘어가는 문장과 적당히 허세가 깔려있는 주인공의 취향, 그리고 적당한 외설적인 묘사가 중학생인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그 뒤로 이 책, ‘상실의 시대’와 ‘태엽 감는 새’, 기타 단편 소설들을 많이 읽었죠. 


 나이가 좀 들고난 다음엔 ‘나쓰메 소세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자이 오사무’ 같은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작가들의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특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은 아직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루키 덕분에 일본의 좋은 작품들을 많이 읽게 되었죠.


 올여름의 끝자락에서 우연찮게 서점에서 만난 ‘상실의 시대’, 아니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땐 ‘상실의 시대’라고 했었는데 요새는 원작 제목을 살려서 ‘노르웨이의 숲’으로 부르더군요.


 책 제목을 비틀즈의 동명의 곡에서 따온 거라 그 뜻을 살리려면 ‘노르웨이산 가구’로 번역하는 게 맞는 걸로 아는데, 뭐 하루키상이 “숲입니다.” 하면 숲인 거겠죠.


 개인적으로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더 좋아합니다. 원작 제목도 너무 좋지만 한국에서 붙인 저 제목이 비단 이 책뿐만 아니라 그 후의 하루키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정말로 깊어. 그런데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한 줄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쿨찐 주인공이 절친과, 절친의 여자친구를 잃고 고뇌하며 방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중반부쯤, 돌격대가 잡아온 반딧불이를 와타나베가 옥상에서 풀어주는 장면에서 끝을 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죠.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은 ‘반딧불이’라는 단편소설이었고 그 걸 중장 편으로 늘린 게 바로 이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책을 읽으면 책의 앞쪽 부분과 뒤쪽 부분은 톤 앤 매너에서 차이가 조금 납니다. 2부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새로운 인물들도 등장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책을 1부와 2부로 나눈다고 치면 개인적으로 책의 1부를 더 좋아합니다. 2부는 약간 내용을 불린 느낌이 없지나마 있기도 하고, 아직 초창기 작품이라 그런지 과한 설정과 표현이 특히 2부 쪽에 많아서요.


 가령 1부에 해당하는 기즈키의 자살 이후, 나오코가 성인이 될 때 와타나베는 그녀와 섹스를 하게 됩니다. 그 섹스에는 둘에게 꼭 필요한 행위이자, 예술적으로 둘의 감정과 상황을 대변하는 좋은 요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둘에게, 그리고 성인이 되고 곧 성인이 될 두 남녀에게 ‘섹스’라는 요소를 집어넣는 것이 ‘문학적’으로 과하지는 않지요. 외설적이라기 보단 안타깝다는 생각과 성인이 되려는 둘의 통과의례라는 느낌이 더 크게 느껴졌고, 그 장면을 통해서 둘에게 '기즈키'라는 인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가 역설적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부에서는 나오코의 자살 이후 이어지는 레이코와의 섹스는 약간 오버스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즈키의 자살과 나오코와의 섹스, 나오코의 자살과 레이코와의 섹스라는 그들의 관계를 등치 시키고 싶었던 생각이 아니었나 하는데 그렇게 와닿지는 않더군요.


 1부의 섹스는 둘에게 꼭 필요한 관례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2부의 섹스는 하루키의 욕심이 과했다,라는 생각이 좀 많이 들었거든요. 좀 과한 성적묘사도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던 것 같네요.


 하여튼 이 책은 하루키의 첫 성공작이나 데뷔작은 아니지만 대성공한 초창기 작품 중 하나로, 다른 작품들도 대개 유사하지만 이 작품에도 ‘무언가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가 주된 내용입니다. 


 작중 ‘나오코’가 말한 우물 이야기처럼 [모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깊은 우물이라는 이름의 공허함.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우물을 어떻게 꾸미고 또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것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온 하루키의 문학세계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10대 땐 그저 유명한 책이라서 읽었고, 책에 대한 감상은 재밌고 술술 잘 넘어가는 책이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0대에 이 책, ‘상실의 시대’를 다시 봤었을 땐 세상에…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와타나베는 절친인 ‘기즈키’를 잃어버립니다. 이후 극의 끝엔 기즈키의 여자친구, 자신의 친구이자 여자친구였던 ‘나오코’ 마저 잃어버리죠.


 그리고 ‘나오코’와 같은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레이코’를 만나 그녀를 추모하고 둘은 섹스를 하게 됩니다. 레이코와 헤어진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런데 전화 속 내용은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자신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서 혼란스럽게 소설이 끝나버리니까. 좀 무책임하달까, 자신이 만든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너무 없달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나왔던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나서


“상실의 시대에서는 미도리라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공허를 채우지 못한 주인공이 방황을 했는데 이 작품 속의 스쿠루는 ‘사라’라는 사랑을 만나 그 사랑을 위해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고 계속 살아가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도 많이 늙었구나,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약해지나 보다.”


 하는 감상평을 남겨놓았었습니다.


 30대에 다시 읽은 ’ 노르웨이의 숲‘의 끝은 정반대, 오히려 해피엔딩으로 느껴졌습니다. 극의 마지막 문장에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거든요.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에 하나인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지.”와  “피츠제럴드 정도면 죽은 지 100년이 안되었어도 괜찮아.” 같은 대사를 봤을 때 ‘노르웨이 숲’과 ‘위대한 개츠비’를 겹쳐서 보는 게 무리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가 미국 문학의 광팬이기도 하고요.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붗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중략-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항상 서 있던 그의 집 발코니. 그곳엔 강 넘어에서 초록빛으로 밝게 빛나는 데이지의 저택이 있었습니다. 그 ‘녹색 불빛’을 통해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 것처럼,


 와타나베도 잠시 방황하다가 미도리라는 ‘녹색 불빛’으로 돌아갈 것이니까. 그래서 와타나베에게 ‘미도리’라는 초록의 의미를 가진 친구를 준 게 아닐까요?


 개츠비는 끝내 자신의 ‘그린라이트’인 데이지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다르죠. 와타나베에겐 ‘녹색 불빛’이라는 ‘미도리’라는 존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와타나베에겐 자신을 담금질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미도리라는 희망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노르웨이의 숲’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 않을까요?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한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를 잊고 지냈습니다. 물론 올여름에 이 책을 다시 읽긴 했어도 또 그 몇 개월간 하루키를 잊고 지냈죠. 하루키가 다시 제 삶 속에, 제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은 건 최근에 본 한 영화 때문입니다.


 바로 '드라이브 마이 카'였죠. 제가 대학 졸업반일 때 읽었던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수록작이었던 것 같은데 영화를 보다가 '원래 이런 내용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단편집 2~3개를 섞어 만든 작품이라 하더라고요.


 이 작품 역시 좋은 영화고 할 이야기가 너무너무 많은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그 영화의 중반부까진 "아주 좋다, 명작이다." 하면서 감탄하면서 봤는데 "후반부는 뭐랄까 좀 작위적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 일본영화 특유의 가르치려 든다고 해야 하나 너무 교훈적이라고 해야 하나 등장인물이 갑자기 구구절절하게 해설을 하거나 등장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듯이 이야기하는 그런 게 나와서 조금 별로였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아주 좋은 영화지만 그 부분이 유독 눈에 걸리더군요. 


 올 누드보다 살짝 가린 세미누드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예술에도 그런 소비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을 남겨 놓는 것이 전 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루키는 주인공들에게 "그때로 돌아가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어.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 하면서 대사를 쓰고 주인공을 질질 울리지 않아도 우리에게 그런 쓸쓸한 감정을 충분히 전해줄 수가 있지요. 


 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하루키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런 감정을, 아니 더 큰 생각거리를 주는 작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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