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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윈 Nov 28. 2023

명작 다시 읽기 - 두 교황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번에 리뷰할 영화의 제목은 ‘두 교황’입니다. 현 교황님인 ‘프란체스코’와 그 전 교황님이었던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이하 존칭은 빼고 교황, 추기경으로 두 분을 언급하겠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265대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다음 교황이 누가 될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바티칸에 모여 투표를 합니다.


 아르헨티나의 추기경 ‘베르고골리오’는 교황직에 별 관심이 없고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지만 보수적인 독일의 추기경 ‘라칭거’가 교황이 되는 걸 막아야 한다며 진보성향의 추기경들은 베르고골리오에게 투표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국 라칭거가 교황에 선출되고 그가 265대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즉위하게 되죠. 영화는 시간이 흘러 2000년대 초반으로 흐릅니다.


 가톨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신부들의 성추문 스캔들로 인해 교황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추기경 직에서 은퇴를 결심한 베르고골리오는 자신의 은퇴 서류에 사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넘어와 교황을 만나게 되고 본격적인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님이 항상 움직인다면 우린 어디에서 주님을 찾아야하나요?"

"이동하면서요."


 이 영화는 신앙적 요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 교황과 가톨릭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으면 훨씬 더 깊게 영화를 즐길수가 있습니다. 물론 가톨릭에 거부감을 가지신 분이거나 배경지식이 없다면 영화를 100%로 즐기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신앙적 요소나 배경지식 없이 영화 자체로만 봐도 꽤나 괜찮은 작품입니다. 영화 초반부터 교황과 추기경을 대비시키면서 각각이 상징하는 가톨릭의 모습을 보여주는 솜씨가 아주 좋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좋은 유머코드를 넣어두었고 영화의 시퀀스나 컷의 구성도 좋지요. 그리고 자칫 한 쪽으로 기울어 질 수 있는 두 교황의 분량도 영리하게 잘 배분 해두었습니다.


 이 영화는 흔히말하는 ‘버디물(buddy)’의 진행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맨 인 블랙’이나 ‘살인의 추억’, ‘검은 사제들’같은, 두 명의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가 버디물입니다.


 모든 버디물이 그렇진 않지만 제가 좋아하는 버디물의 특징은 공통점이라곤 같은 직업이나 목적을 가진 것 밖에 없는 두 사람이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 서로를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제가 좋아하는 버디영화와는 조금 다른 맛을 보여줍니다.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인물의 끊임없는 격돌까지는 버디영화의 뼈대를 따르지만 영화 후반부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나 '굿 윌 헌팅'같은 성장영화에 가까운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추기경이고 그의 분량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영화내에서 끝내 구원받는 인물은 교황이 됩니다. 추기경보다 물리적 분량은 적지만 변화한 교황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에게는 교훈적인 내적 분량을 선사합니다. 그런 균형잡힌 시선을 보여주는 감독이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힘든 일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오. 아무래도 영적인 보청기가 필요한 것 같소."

 



 교황은 영화 내에서는 보수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체면이나 예법을 중시하고 가톨릭이 여태까지 지켜온 전통과 보편성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교황의 모습에서 비춰지기 보다는 추기경의 모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영화는 그를 아주 뛰어난 신학자인 것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교황으로 묘사하지는 않지요.


 그의 최측근은 바티칸의 중요문서를 언론에 폭로하고 바티칸 내에 파벌이 생겨 신부들의 권력다툼이 생기고 바티칸 은행의 위법행위에, 그전부터 문제시 되었던 신부들의 성추행 문제까지.


 언론과 대중이 교황과 가톨릭을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 것으로 영화에 묘사됩니다. "훌륭한 선수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스포츠 계의 격언처럼 교황 역시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좋은 리더쉽을 가진 조직의 리더가 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추기경을 만나 설전을 벌일때도 그는 그러한 문제 해결에 다소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즉각적으로 성추문을 일으킨 신부들을 처벌하고 피해자의 마음에 위안을 주자, 발전한 세상에 비해 교회는 아직도 구시대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어 괴리가 있으니 그런 괴리감을 없애야 한다, 미혼모나 이혼한 사람에게도 성체를 주고 품어야 한다는 추기경의 발언에 그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입니다.


 즉 그는 변화하지 못하는 옛 가톨릭 교회를 상징합니다.


 반면에 베르고골리오 추기경은 진보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교회에서 미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 광장에서 자유롭게 미사를 진행하고 대중속에 들어가 그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피아노로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베네딕토 교황과는 달리 탱고를 추는 것을 좋아하고 아바의 ‘댄싱퀸’을 흥얼거리는 사람입니다.


 또한 교황에 반해, 미혼모와 이혼남녀에게 보속을 주고 성추문을 일으킨 신부들을 모두 교회법으로 처분해야한다는 등 퀘퀘묵은 교회법에 반기를 드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즉 그는 시대에 발 맞춰 교리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지금의 가톨릭 교회를 상징합니다.


 물론 영화의 묘사를 보고 실제로 베네딕토 교황이 저런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다소 잘못된 생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도 '개혁'까진 아니더라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신학적 역량에 비해 조직의 우두머리로서의 역량이 부족했기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맞는 표현이겠지요.


 어쨋든 영화의 시선은 추기경에게 마음이 기대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그가 진정한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또한 교황에게 찾아온 예수, 혹은 구원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지요.


 때문에 영화에서는 처음에 교황을 다소 부정적으로 그립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나쁜 시선으로 교황을 보는 것이 아닌 그에게 연민이 담긴 시선을 같이 보여줍니다.


 교황은 고급 피아노를 치고, 좋은 와인을 마시고 많은 전자기기를 자연스럽게 다루지만 그의 식사는 아주 단촐한,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독일식 미트볼을 먹고 환타를 마시지요.


 추기경은 수녀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농담을 하며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교황은 자신의 서재에서 쓸쓸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은 그가 가지고 있는 왕관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하지만 추기경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점점 변하기 시작합니다. 농담도 하고, 표정도 밝아지지요.





"축제는 끝났습니다."


 영화의 끝에서는 교황과 추기경은 시스티나 성당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직을 내려놓을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되지요.



 추기경은 처음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계속 교황직을 유지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교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추기경은 교황의 고해성사를 보게 되지요.


 고해성사가 끝나고 교황은 그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관람객들이 많으니 다른 곳으로 나가자는 추기경의 말을 거부하고 관람객들이 가득찬 곳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죠.


 그전까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살았던 교황이 비로소 담을 무너트리고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순간입니다.


 영화 초반, 둘이 처음 정원에서 만나 이야기 할 때 교황은 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언론을 방어하기 위해 담벼락이 필요하다고요. 하지만 추기경은 정면으로 반박하지요. 예수님은 담을 지어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다고.


 추기경에게 교황 직을 내려놓을 것을 말하고 나서 그는 여태 자신이 짊어지고있던 가톨릭의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동시에 교회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속죄 역시 보속받음으로써 비로소 자신 마음 속의 담을 무너트립니다.


 그러한 교황의 홀가분함은 관람객들이 가득한 시스티나 성당의 홀로 나가,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는 씬으로 표현됩니다. 교황을 걱정하는 비서와는 달리 교황은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신자들과 사진을 찍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황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실 추기경은 영화 초반부나 후반부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물론 그 역시 영화 초반부와 달라진 점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속죄의 문제일 뿐 그의 캐릭터에 영향을 줄 정도의 변화는 아니지요.


 이렇듯 이 영화는 두 사람이 만난 후에 서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교황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추기경을 그에게 보내준 것 같은 이야기로도 보입니다. 이렇게 이 영화는 버디영화로 시작했지만 성장영화로 끝이 납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주님께서 고해성사를 들으라 하셨어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형제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제는 영화의 신앙적인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명작'이라는 것에 대해 갸우뚱할 수도 있겠지만 전 신앙인으로서 이 영화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몇 번 영화를 봤지만 볼때마다 영화에서 다른 것이 보이고 또 다른 것을 묵상하지요.


 많은 장면들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한 장면을 꼽으라면, 추기경이 신부가 된 계기가 되는 고해성사 시퀀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젊은 추기경, 호르헤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되고 싶다는 꿈도 가지고 있어 갈등을 하고 있지요. 고민 끝에 그는 여자친구에게 청혼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신부의 꿈을 내려놓기로 합니다.


 멋진 옷을 입고 약혼반지와 꽃을 사들고 약속 장소로 가려다 그는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곳엔 한 신부님이 그를 기다리는 듯 있었고, 그에게 고해성사 보기를 권유합니다.


 고해를 보기 전에 호르헤와 신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르헤는 그가 암에 걸린 시한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오늘 아침에 주님께서 고해성사를 꼭 받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당엔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죠. 형제님이 오시기 전까지는요.”라는 말을 하면서 비로소 성사가 시작됩니다.


 그 장면이 저에게 준 감동은 아주 컸습니다. 고해성사가 어쩌고, 신부가 되는 길이 어쩌고 하는 건 전 잘 모릅니다. 성경의 말씀이나 기도문의 구절을 가지고와서 이야기 할 정도로 신실한 신자도 아니지요.


 하지만 그 시퀀스를 구성하고 있는 문학적, 예술적 어쩌면 신앙적 요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배치라고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던가 ‘하느님은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같은 추상적인 말을 이 장면으로인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춘수의 시, ‘꽃’에서 화자가 그를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화자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 이 시를 '인식에 따른 가치'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내가 좋아하면 그것은 의미 있는 것이 되지요.


 저는 이 시가 표현하고 있는 '가치'를 잘 나타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체험의 영역이어서 신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신앙활동은 비생산적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을 전 잘 압니다. 저도 한 때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요.


 성체사진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성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저것이 왜 예수의 몸이 되는지, 미사중 신부가 마시는 포도주가 왜 예수의 피가 되는지 설명을 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을 설명한다고해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성체가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기도를 하는 신자들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한낱 몸짓으로 보일지 몰라도 성체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신자들에게 성체는 꽃으로 다가옵니다.


 영화를 보고난 후에 든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두 교황의 신앙적 고뇌나 신앙적 묘사가 제게는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남들에겐 그저 몸짓으로 보일지 모를, 그 지루하다면 지루한 장면들이 제게는 꽃으로 다가왔지요.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가 뭐냐는 질문에 "만일 당신이 재즈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면, 당신은 재즈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지요.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신앙적 감동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제가 느낀 감동을 꽃이 아닌 몸짓으로 느껴진다면, 제가 느낀바를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제 이야기는 꽃이 아닌 그저 몸짓으로 느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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