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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윈 Nov 25. 2023

명작 다시 읽기 - 데미안

싱클레어들에게 데미안이라는 구원이 찾아오기를, 꼭 찾을 수 있기를!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항상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이곳저곳에서 인용도 많이 되고 추천도 많이 되다 보니 모르긴 몰라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소설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데미안은 완독 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책입니다. 인물들의 대사가 예스럽고 장황한 데다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대학생이면 몰라도, 중 고등학생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이 쉽지가 않지요.


 제가 처음 이 책을 접했던 중학생 때도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하는 대사들이 너무 많았고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다시 책을 읽었던 고등학생 때는 조금 나았고, 20대 중반에 또 읽었을 때는 그전보다 더 다른 것들이 보였고 30대 중반에 다가간 지금은 다행히도 그 전의 저보다는 훨씬 더 다채롭게 이 책을 읽게 되었네요.




 “표식이 먼저 있었고 표식을 토대로 이야기가 시작된 거야. 카인은 멋진 남자였어. 다만 사람들이 카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런 이야기를 갖다 붙인 거라고.”



 책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에밀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프란츠 크로머’라는 불량소년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싱클레어가 정신적으로 무너져 갈 때 구원처럼 ‘데미안’이라는 소년이 나타나 그를 크로머의 괴롭힘에서 구해줍니다.


 이후 싱클레어는 김나지움으로 진학을 하면서 데미안과 멀어지지만 그가 방황하거나 심적으로 괴로워할 때 항상 데미안이 나타나 그를 다시 잡아주었기에 싱클레어는 올바른 길로 걸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1차 대전이 발발하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군입대를 하게 되고 싱클레어는 그곳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됩니다.


 다시 한번 자신에게 큰 위험이 닥쳤을 때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나타나 그에게 “앞으로 나는 달려오지 않을 거야. 대신 네 안에 귀를 기울여 봐.”라는 조언을 하고 키스를 해주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사랑은 천사의 영상이며 악마였고, 남자인 동시에 여자였고,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었고, 최고의 선인 동시에 극단적인 악이었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서양작품 치고는 동양적 사상, 특히 불교적 색채가-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 ‘싯다르타’를 생각해 보면 특이할 것도 없습니다만-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은 꾸준하게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신과 악마등 대비되는 존재들은 결국 같은 존재이며 그것을 나누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즉 우리의 내면에서 나온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의 ‘공’의 의미와 비슷하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불교에서는 양극단에 놓인 모든 것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불교의 첫 부처이자 시작점인 싯다르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죠.


 싯다르타가 활동하던 세상은 카스트제도에 갇혀있었죠.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궁 밖의 세상을 경험한 날, 그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왕자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싯다르타는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지위를 버리고 가난한 수행자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행과 묵상을 계속한 결과, 그는 진리를 깨닫지만 상한 버섯죽을 먹고는 탈이 나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아난다에게 “나의 가르침은 너희들의 마음속의 남아 스승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라는 유언이자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남깁니다.


 싯다르타, 부처의 마지막 가르침은 소설 속에서 ‘양극단에 놓인 모든 것은 시선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언급되는 ‘너희가 여태까지 배운, 알고 있는 것들보다 너희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라는 이야기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 헤르만 헤세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요. 이번에는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집필하던 당시 시대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영혼은 미친 듯이 날뛰며 죽이고 파괴하고 죽어서 새로 태어나기를 원했다.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힘겹게 싸웠으며, 그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데미안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19년으로 세계 1차 대전이 종전한 1년 뒤입니다.


 세계 1차 대전 직전 유럽의 젊은이들은 평화와 낭만이 가득 찬 ‘벨 에포크’ 시대를 보냈습니다. 앞으로는 전쟁이나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최선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낙관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그 전의 세대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죠.


 그래서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들은 앞다투어 자원입대를 하게 됩니다. 전쟁을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사건이라 생각하기보단 그리스 신화 속의 영웅들이 했던 모험 내지는 영웅놀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인류가 이 정도로 성숙해졌고 발전했는데, 상식적으로 이런 전쟁이 길게 이어지진 않을 테니 금방 끝나겠지? 용감하게 싸우고 적군을 무찌르고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보내면서 나의 무용담을 뽐내야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전쟁이 점점 길어지고 유럽 전 대륙이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는 세계대전으로 커지게 됩니다.


 후에 1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나중에 일어날 2차 대전보다 더 끔찍한 참호전 양상을 띠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의미 없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전쟁의 낭만'과 '조국의 정의'가 산산조각이 나게 되지요. 전쟁은 낭만적인 영웅놀음이 아닌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의 놀이이자 승자도 패자도 없는 치킨게임이었죠.


 특히 전범국이자 패전국이 된 독일 청년들에게는 여태 사랑해 왔던 조국이 잘못된 선택하나로 절대적인 악이 되었고 ‘조국 방위’를 위해 당긴 방아쇠가 사실은 ‘악마의 창 끝’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혼란스럽고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전쟁은 끝났지만 젊은이들에게 남아있던 것은 낭만의 파괴와 전쟁의 참상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이 틀렸고 이젠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런 상황에서 헤세가 세계의 젊은이들, 특히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세상엔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습니다. 모두 다른 것일 뿐이고, 주위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고 여러분 마음속의 데미안을 찾으십시오. 그는 당신이 당신만의 신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념이나 양심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피가 조금 맺혀 있는 내 입술을 살짝 스치는 입맞춤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당대 독일인들에게 책이 큰 위로로 다가왔고, 철학적이나 종교적으로 좋은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데미안이 계속 사람들에게 읽히고, 고전소설이라 칭송받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이 읽다 보면 ‘어? 이거 내 이야기 같은데?’하는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아주 잘 쓰인 성장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싱클레어는 평범한 소년입니다. 착한 부모님과 가족 품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다가 한순간의 실수로 악인 ‘크로머’에게 수난을 당합니다. 그때 데미안이 나타나 크로머에게서 싱클레어를 구해주게 되지요.


 싱클레어는 이번엔 김나지움에 진학 이후 술에 빠져 학업을 멀리하게 됩니다. 다시 싱클레어의 길이 엇 나가려 할 때 데미안과 베아트리체가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 이후에는 피스토리우스를 만나면서 생각의 지평을 넓히게 되고, 나중에는 에바 부인을 만나 완전한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듯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비롯한 여러 인도자들을 만나면서 점점 성장해 가는 과정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 즉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든 괴로운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 무언가가 있었겠지요. 그것이 같이 술잔을 기울여 준 친구였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항상 뒤에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훌륭한 선생님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힘을 얻었을 수도, 또 다른 사람은 일상의 풍경 속에서 위안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요.


 ‘데미안’으로 대표되는 구원이라는 빛은 희미해서 평소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낮에는 태양빛에 가려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지만 밤이 되면 수많은 별들의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주위가 어두워지며 구원의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죠.


 그리고 우리는 그 빛을 통해 괴로운 상황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그 빛이 친구든 신앙이든 가족이든 책이든 영화든, 일상의 풍경이든 뭐든 간에요.


 제가 소설 ‘데미안’을 사랑하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싱클레어가 저였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 그리고 베아트리체가 되어주었던 존재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힘든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시 제게 힘을 줄 무언가가 나타날 것임이 분명하기에 ‘데미안’은 제게 미래를 위한 용기와 희망을, 과거에 대한 추억과 감사를 일깨워주는 인도자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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