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창세기를 읽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정독하면서 느낀 점은 부족한 점들이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창세기가 쓰인, 혹은 성경 속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에선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거나 정당했을지라도 현대인이 받아들이기엔 굉장히 당혹스러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여하튼 읽는 게 좀 괴롭지만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재미있게 읽는 중입니다.
지금은 야곱의 이야기를 읽고 있고, 곧 야곱과 에사우의 재회와 그들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묵상록 3편에서 영화 미션을 통해서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이야기를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와 함께 소개를 드릴걸 싶은 생각이 들었네요.
지금까지 창세기를 읽어오면서 수많은 인물들이 나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입체적이고 문학적 구조가 나름 잘 짜인 인물은 '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전에 등장한 인물들은 성경 속에서의 소개가 너무 단편적이라 생각할 거리가 별로 없었는데 야곱은 일화들이 많아서 읽기도 재미있더라고요. 야곱이 후에 천사와 레슬링 한 판을 치른 다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니 후대 창세기 저자들이 그의 소개에 집중을 더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겐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야곱의 한 일화를 토대로 '희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20장 1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거칠게 한 줄 요약을 하면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간 노동착취를 당하는 이야기이고, 좀 더 내용을 붙여 이야기를 하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을 일했는데 7년 후에 라헬이 아닌 그의 언니 레아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국 7년을 더 일해 라헬과 결혼을 한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욥, 너는 야곱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라고. 저는 못 할 것 같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게 건강한, 혹은 지속가능한 관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희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희생이라는 단어 속에는 상호 간의 작용이 없습니다. 타인을 위해 내가 하는 일방적인 관계만 존재할 뿐이죠.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희생을 한다면 그 관계는 언젠가 깨질 겁니다.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내가 한 만큼 조금이라도 돌려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제 부모님이지요.
예전에 부모님과 술을 한잔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들 둘 키우시느라 참 욕 많이 봤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는 "잘 커줘서 고맙다. 욕보긴 뭘 봐. 우리가 더 고맙지, 사고 안 치고 잘 자라줘서."라고 웃으며 대답하시더라고요.
희생이란 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희생하다'를 자동사로 생각하곤 합니다. 어쨌든 '내'가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내가 타인을 위해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나는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타인이 자신을 위해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해 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희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부모님은 저와 동생을 키우시면서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더 못해줘서 미안하고, 잘 커줘서 고맙다고. 당연히 살아오시면서 어떤 순간에는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 하셨던 것들을 '희생'했다고 생각하셨을 테지만, 대체적으로 그 모든 것들을 희생이라 생각하시지 않으셨을 테지요.
진정한 의미의 희생은 이러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타인을 위해 조건 없이, 대가 없이 무언가를 행하는 것, 그리고 타인이 그것을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속엔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이 존재해야만이 진정한, 또 건강한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