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보며, 못 이기듯 손을 맞잡고
킬리만자로의 그녀
밤 11시경, 두 남녀가 차 안에 앉아있다. 차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둘은 손에 따뜻한 음료를 들고 추위를 달래며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와중에 나는 자동차 배터리가 걱정되었다. 1년에 4번 이상은 배터리 문제로 긴급출동을 부르는 바, 이 추운 겨울에 한 곳에서 오래 공회전을 하다 방전 돼버리면 어쩌지? 이런 로맨틱한 순간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나의 뇌 한 귀퉁이.
그래서 차를 몇 번 이리저리 옮겨댔다. 그러다 산을 등지고 있는 단독주택이 즐비한 한 거리에 정차하였다. 왼쪽으로는 검은 산이, 오른편으로는 이국적인 디자인의 멋진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고 우리 시야 정면으로는 몇 그루의 가로수가 내리는 눈의 리듬에 맞춰 가볍게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 당시 와이프가 찍은 풍경 사진. 이런 사진들이 남아있어서 너무 기쁘고 다행이다.
"쌩얼도 괜찮은데요?"
"그래요? 이 정도는 감당되시죠?"
대화를 하며 그녀는 화장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제 봤던 화장한 모습이 훨씬 드문 모습이라고 했다. 눈 화장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때의 얼굴과 크게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피부가 꽤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첫 만남에서 대화가 개론이었다면 이번엔 심화편이었달까. 특히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들에게 말을 잘 놓는 나는 말을 놓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요이땅하고 말을 놓는 건 잘못하지만 자신은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놓는다고 하였다.
가본 곳 중 추천할 만한 여행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또 한 번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무려 몇 년 전에 킬리만자로를 등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덧 편한 말로 대화에 응하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응, 한참 여행 많이 다닐 때 의기투합한 몇 명이랑 해서 다녀왔거든. 너무 힘들었는데 진짜 너무 기억에 남아. 그리고 그때 탄자니아에서 본 아이들을 잊지 못해서 귀국 후에 세이브 더 칠드런으로 탄자니아 아이 한 명을 후원하고 있어"
첫 만남 때 와인바 이야기에 이어 또 한 번 내 귀를 의심하는 이야기를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나는 스스로 도전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살아왔지만 내 인생의 실제 바운더리는 매우 좁았다.
그런 이야기를 다른 여자에게 들었다면 나는 놀라움과 더불어 거부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무엇인가 나랑 어울리기에 너무 먼 곳에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 모든 것들을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또 한 번 배터리 걱정에 차를 슥 옮기는 중 나는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당황한 듯 손에서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가 이렇게 잡으면 못 이기듯이 같이 잡아주는 거야"
"아 그런 거야? 하하하"
유쾌한 웃음과 함께 내 손을 꼭 맞잡아주는 그녀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귀엽고 고운 손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말하길 내가 손을 잡는 그 순간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려 몸이 굳어버렸다고 했다.
약 1시간 반가량의 폭설 속 만남을 마무리하고 그녀의 집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토요일에 다시 한번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은 1월 9일, 내 생일 다음날이었다. 여건이 되면 술도 한잔하기로 하였다.
그녀를 내려주고 집으로 가는 중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쯤이야?"
"응 이제 한 10분 좀 안 남았어. 다 와가"
"그쪽길도 눈 많이 쌓였지? 조심조심 천천히 가"
"지금 30킬로로 가고 있어"
"너 도착할 때까지 계속 통화할래"
"안전 운전하게 도와주는 거야? 그래 그렇게 하자"
밤 12시가 넘은 어두운 눈길이었지만 따뜻한 온기로 내 가슴속 눈은 천천히 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