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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야감 Oct 09. 2024

손가락을 회복중입니다(약간 혐주의)

44문장

입원기간 동안 가장 걱정되는 것은 다름 아닌 씻기였습니다. 붕대를 잔뜩 두른 왼쪽 팔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른쪽 팔 역시 링거를 꽂아놨기에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죠. 역시 도움을 기댈 것은 와이프밖에 없었습니다. 저녁 식사시간 후를 이용하여 남자화장실의 샤워실 비슷한 공간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씻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딥니까. 다리를 다쳤다면 이 마저도 더 고된 과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손가락 하나 다친 건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수시를 앞두고 있는 시기인지라 학교에서 받는 연락들을 취합하여 한 손 타이핑으로 학생들의 생기부를 마무리해 나갔습니다. 노트북을 세팅하여 병상에 올리는 것도, 비밀번호를 쳐 로그인하는 것도, 한 글자 한 글자 내용을 입력해 나가는 것도 평소보다 10배는 더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도저히 누구에게 맡길 수가 없는 일이기에 천천히 마무리해 나갔습니다. 저의 빈자리를 학교에서 메우고 계신 다른 선생님들께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이틀에 한번 붕대를 풀고 상처부위 소독과 링거 교체를, 하루에 한 번 기묘한 통에 들어가 산소치료를 실시했습니다. 모든 과정을 처음 할 때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수술 후 처음 소독을 실시할 때는 도저히 상처부위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 손가락이 기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흉측한 모습은 아닐까, 그 모습에 고통은 가중되고 나는 좌절하지 않을까 하는 짐작 때문에요. 두 번째 소독 때는 슬쩍 손가락을 흘겨볼 수 있었는데 기대보다 정상적인 모양에 안심하였습니다. 다만 수술 때 그어놓은 보라색 볼펜자국과 찢어진 상처, 수술 자국, 그리고 그 위에 수놓아진 꿰맨 흔적이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기엔 먼 여정이 있음을 함의하고 있었죠.




저는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날카롭고 땡땡한 바늘이 얇고 연약한 내 혈관을 찢어버릴 것 같은 공상이 자꾸 들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며 어쩔 수 없는 피검사 때문에 혈관에 바늘을 허용해야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 멀리 돌려 그 모습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링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주삿바늘이 꽂혀있어 뻐근해지는 기분 나쁜 감각은 물론이거니와 손을 사용함에 따라 생기는 압력차이로 피가 튜브로 역류하는 모습은 참으로 불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저의 링거 교체를 맡은 간호사 분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무감정한 표정과는 상반되는, 매우 서툰 혈관 주사 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무언가 우직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저와 와이프는 ai곰팅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요,(당연히 우리끼리만요) 그녀는 링거 바늘을 교체할 때마다 1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하였고, 한번 꽂은 바늘을 빼고 다시 꽂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도저히 바늘을 꽂지 못해 선배 간호사를 부르기까지도 했습니다. 대신 들어온 선배 간호사가 정말 거짓말 없이 5초 만에 일을 해치우자 저와 와이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실소를 터뜨리 말았습니다.





이틀차부터 저는 입원생활을 호캉스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치료과정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과 제때 나오는 맛있고 영양 좋은 식사, 손가락이 아플 뿐 각종 영양제를 맞으며 올라가는 몸컨디션,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걱정으로 저는..


'이거.. 괜찮은데?'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의 병문안은 또 다른 소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가족들, 친구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저를 보러 와주었고 병원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단조로운 병원 생활에 활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음식을 크게 가리지는 않아도 돼서 가져온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는데 역시 병원밥이 순하고 몸에 좋은 것인지 외부음식을 먹게 되면 다음날 속이 좋지 않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병원밥에 거의 매 끼니마다 들어있는 무를 보며 엄마가 왜 그렇게 저에게 무가 약이다라고 하셨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저는 퇴원을 하여 학교에 복귀했습니다. 한 손을 붕대로 칭칭 감은 비주얼덕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저의 안부를 여쭤주셨고 '요리하다 다쳤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을 끝내기 아쉬웠던 저는, 그 상세한 경위를 매번, 수차례 늘어놓으며 유별난 저의 일상을 공유하곤 했습니다.


그 후 병원에 내원하여 새로 붕대를 감을 때마다 손가락이 하나씩 자유를 얻었습니다. 마침내 상처 입은 4번째 손가락만 붕대로 감쌌을 때는 다시 일상에 가까워졌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손가락에 씐 것마저 벗어버리고 각질로 가득한 손가락을 들여다보았을 때, 꽤나 잘 붙어있는 상처부위와 상반되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손가락 마지막 마디 감각은 약간의 괴리감을 전해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6개월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잊는 큰 행복 중 하나는 내 의지대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발바닥에 큰 사마귀가 여러 개 생겨 한참 고생했던 때, 오른손 손가락이 부러져 왼손으로 공부해야 했을 때, 어깨 관절을 다쳐 한참 하던 웨이트 운동을 몇 개월 쉬어야 했을 때, 그럴 때마다 저는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운동할 수 있음의 행복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습니다. 이번에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로 향할 때 이 손가락이 없더라도 일상을 살며 운동은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별것 아닐 수 없는 일련의 손가락 이슈로 저는 또 한 번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 합니다. 요즘 어느 때보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며 행복을 느낍니다. 왼손 4번째 손가락 끝의 저릿함은 행복의 진동으로 그렇게 간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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