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집을 바라보았다. 해질녘의 어스름과 어둠이 기묘하게 섞여있는 풍경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이 적막을 마주하는 순간이 싫었다. 문을 잠그고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가만히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저물어 가는 해는 무심하게 공간의 빛을 제거해 갔다. 이제 마주할 어둠은 너 혼자만의 몫이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하루 이틀일이 아니지만 잘 넘어가지 않은 알약을 삼킬 때의 공포처럼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배는 고프지만 고프지 않았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밖으로 나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만이 그득한 공간에 아이는 혼자 서있었다.
'탈칵'
국가의 건조한 복지 같은 거실불이 켜졌다. 거기에는 어떤 애정도, 어떤 깊은 배려도 없었다. 어둠만을 없애주려는 그 단출한 목적만이 존재하는 빛이었다. 덕분에 앞을 볼 수 있고 어둠의 공포는 물리 칠 수 있었지만 마음을 위로해줄 따뜻함은 없었다. 외딴곳에 있는 마음은 그대로 표류하고 있었다. 소파 오른편에 놓여있는 리모컨으로 다가갈지 책가방 속에 숙제를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엄마가 오려면 아직 3시간이 남았다. 한밤중이나 돼야 한다. 해가 저물 때면 엄마는 한창 바쁘다. 이 시간에 집에 없는 엄마가 미웠지만 미운 마음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엄마는 집에 돌아와 내 숙제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날 혼내겠지. 왜 아직 문제를 풀지 않았냐고 말이야. 문제를 풀어야지. 숙제를 끝내야지.
아이는 일어나서 책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가방 안쪽 작은 주머니에 하얀 조각이 보였다. 좁은 공간을 두 손가락으로 해집어 꺼내보니 알약이었다. 며칠 전 학교에서 나눠준 장티푸스 약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줄 세우고 하얀 알약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에게 그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한 번에 삼키라고 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친구들이 운동 경기처럼 알약 삼키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결연한 얼굴로, 누군가는 이건 별거 아니야라는 무심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알약 삼키기 대회에 참전 중이었다. 이미 알약을 삼키기에 성공한 친구들은 개선장군처럼 한쪽 편으로 몰려갔다. 선생님은 그들을 칭찬했다. 절반 정도의 아이들이 여전히 알약과 싸우고 있었다.
마침 수업종이 울렸고 우왕좌왕한 분위기 속에 아이는 물에 겉면이 젖어 번들번들한 알약을 입에서 몰래 뱉어 손에 숨겼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음시간 책을 꺼내는 척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 약을 차마 버릴 용기는 없었다.
아이는 가방에서 알약을 꺼냈다. 젖었던 물이 마르며 매끄러웠던 겉면이 거칠거칠 푸석해져 있었다. 그 하얀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내려다보았다. 겉면이 녹았는지 조금은 작아보인다. 선생님이 반드시 먹어야 되는 약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꿰뚫어 볼 것이다.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컵에 물을 따랐다. 심호흡을 하고 약을 입에 넣고 물을 입안에 잔뜩 머금었다. 첫 모금에 물만 절반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입안의 물 한가운데 알약이 둥둥 떠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물을 먹는 것뿐이야라고 생각하며 힘껏 두 번째 모금을 삼켰다. 입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이다. 약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