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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실효성에 대해 의견이 많습니다. 여행을 가면 식견이 넓어진다는 낡디 낡은 여행예찬론부터 어차피 사람 사는 곳 똑같은데 돈 쓰고 노는 것을 경험이라는 말로 포장한다는 여행무용론까지 말이죠.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맞는 말이죠. 누구에게 여행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한편, 누군가에게는 그 돈 아껴 맛있는 거 하나 더 먹는 기회비용의 한 형태인 것처럼요.
저도 없이 자란 편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비용에 대한 생각을 무척 많이 합니다. 그래서 직장을 잡은 이후에도 첫 해외여행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한번 해외에 가 볼까라는 생각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비행기표 가격을 보자마자 사그라들곤 했습니다. 됐다, 이 돈으로 옷이나 하나 더 사고 치킨이나 몇 번 더 먹지 뭐 같은 한없이 소박한 생각으로의 회귀말이죠.
첫 해외여행은, 여행이라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만, 4-H라는 청소년단체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미국 미시간으로 한 달간 갔을 때였습니다. 12명의 학생이 각각 떨어진 집에서 한 달간 홈스테이를 진행하고 저도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홈스테이를 하며 일주일에 한 번 각 집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파악하여 부모들에게 메일을 쓰는 역할이었죠.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업무가 간단하였기에 저 역시 일보다는 문화체험에 더욱 매진할 수 있어서 여행이라 할 수 있을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1년 뒤 친구와 함께 드디어 제 돈을 들여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오사카로의 3박 4일. 2박 3일 비행기로 잘못 예매하고 돌아오는 공항에서 우리 비행기가 이미 하루 전에 떠났음을 알았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그 자리에서 추가로 든 비행기 값만 제외한다면 너무도 잊을 수 없는 값진 여행이었죠. 아, 그 일마저도 잊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네요.
그 후로 저는 지금까지 일본여행만 6번 더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로의 여행은 잠시금 떠올렸다가 일본여행의 설렘으로 항상 묻혀버렸습니다. 오사카 4번, 도쿄 2번, 후쿠오카 1번이네요. 그 주변을 다르게 다녔기에 같은 지역을 갔다 하더라도 매번 다채로운 여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여행 예찬론자, 조금 구체적으로는 일본여행 예찬론자에 가까운 모습을 띄게 되었습니다. 이 여행들이 주는 알맹이는 저에게는 이렇습니다. 일본여행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는 얘기지만 그것은 바로 완전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은 심리적, 물리적인 거리에 따라 그 밀도가 달리 보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될 수도, 사물이 될 수도, 어떤 개념이나 문화가 될 수도 있겠는데 가까울수록 아무래도 오랜 시간 봐온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을 알고 하나하나 잘게 해체된 파편에 상대적으로 깊게 얽힌 우리의 감정도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완전함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그것을 보지 못하고 거기에 얽혀있는 각종 이해관계와 감정 속에 흐려져 때로는 그 소중함마저 잃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여행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새롭고 나의 판단의 날이 서지 않았기에 그것을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도, 무언가 엉망인 거리도, 한국에서 매우 낯선 문화들도 거기에 가치를 개입시키기보단 그것 자체에 감동하는 것이죠. 물론 우리는 압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생활에 들어와 시간을 겪으면 그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여행이 주는 이 감각이란 매우 소중합니다. 설사 우리가 본질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 눈에 스쳐갔던 그 풍경과 찰나의 감정들이 그 자체로 완전했고 신선하게 우리 삶에 스민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어쩌면 여행자의 눈에는 그것이 본질일지 모릅니다.
가끔 이 시선으로 나의 일상을 살피면 매우 신선한 기분이 듭니다.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 한쌍을 내가 타지에서 외국인의 모습으로 마주했다면 어떻게 느꼈을까 같은 것 말이죠. 그 시시콜콜함은 그 자체로 완전하게 보였을 겁니다. 이미 그 모습이 더 이상 손댈 곳 없는 하나의 브랜드처럼 말이죠.
예, 이게 참 좋아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