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동아리 하면서 알던 애야. 다른 과. 내가 심복처럼 부렸었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주변 사람들이 맨날 너네 사귀는 거 아니냐고 그랬는데, 몇 년 동안은 난 전혀 연애 감정 없었거든"
"그 사람은 아마 감정 있었을 거 같은데"
"근데 걔랑 맨날 놀고 할 때도 서로 남자친구, 여자친구 있었던 적이 많아. 난 남자친구들하고 걔 때문에 싸운 적도 많고. 한 번은 지금 남편이랑 연애할 때 토요일 저녁이었나? 8시쯤.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고 그 즈음 같이 있었는데 걔한테 전화 온 적이 있었거든. 너네 집 근처에 왔으니까 잠깐 같이 산책하자고. 나는 남자친구랑 같이 있어서 못 나간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남자친구가, 그러니까 지금 남편이 누구냐고, 누군데 지금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냐고 아주 노발대발했었거든. 나는 그냥 친구라고 말했는데 무슨 친구가 주말 저녁에 같이 산책을 하고 말이 되냐고 엄청 뭐라 해서 그 이후로는 걔 얘기 일절 꺼내지도 않았어"
"그치, 남편 입장에서는 엄청 신경 쓰이고 짜증 났겠네. 그럼 사귀었던 거는 남편 만나기 전이었겠구나. 남자로 보이지 않다가 어쩌다가 사귀게 된 거야?"
"나랑 걔랑은 진짜 엄청 잘 맞았다? 말도 너무 잘 통하고 관심사도 너무 비슷하고 같이 얘기하면 사흘 꼬박 새울 수 있을 정도로 쿵작이 잘 맞았어. 근데 남자로는 전혀 안 느껴졌었거든. 그리고 걔 집이 진짜 잘 살았어. 부모님이 서울에 건물이 몇 개 있고 그런다고 했던 거 같은데"
"건물이 몇 개?? 하.. 그렇구나"
"애가 그러다 보니까 간절함이 전혀 없는 거야. 맨날 한량같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미래를 위해 뭘 준비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가끔 생각했을 때도 이런 애랑 결혼하면 진짜 답 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걔네 집에 돈 많다는 걸 알고 있어도 딱히 그걸 크게 신경 안 썼던 거 같아"
"집에 돈이 많은 게 최고긴 한데.."
"그러다 한 번은 무슨 교환학생으로 얘가 중국을 1년을 간 적이 한번 있었거든. 걔가 가도 난 별로 신경 안 쓰일 줄 알았는데 떠나고 다니까 정말 너무 허전한 거야. 연락은 자주 하긴 했어도 매일 부르면 오던 애가 없으니까 계속 생각나고 빨리 보고 싶은 생각만 들더라"
"그래? 신기하네. 보통 친구에서 그렇게 감정이 바뀌기가 쉽지가 않은데"
"나도 그래서 그때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 건지 그냥 가까이 있던 사람이 없어지니까 느껴지는 허전함인 건지 구분이 안되는 거야. 근데 확실한 건 얘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한국 들어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 입국하는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는 진짜 설레서 잠도 안 오더라구"
"들어오고선 어떻게 했어?
"근데 이 새끼가 막상 들어와서 만났는데 내가 보고 싶었던 것만큼 날 보고 싶어 했던 느낌이 아닌 거야. 그래서 조금 실망하긴 했지. 그리고서 얼마 안 돼서 통화하는데 갑자기 소개팅을 한다는 거야. 나는 걔에 대한 마음을 좋아하는 마음인 걸로 확신을 하고 고백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찰나였는데 그딴 소리를 들으니가 속이 부글부글 끓대"
"황당했겠다. 남자도 분명 그 분위기를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그냥 떠보려고 했던 말인가"
"그래서 통화하다가 너 그 소개팅하지 말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또 열받게 왜? 이러는 거. 그리고 그냥 전화를 끊었지. 그 후에 어찌어찌하다가 만나게 된 거야"
"결국 그렇게 이어지긴 이어졌구먼"
"우리가 알아온 게 거의 몇 년이야.. 그 사귀기 전까지 6년을 알아 왔는데 서로 타이밍이 어긋났을 때가 많았던 거 같아. 걔가 날 좋아할 때는 난 별 감정 없고 다른 남자친구 사귀고 또 반대일 때도 있고"
"만나다 가는 왜 헤어졌어?
"난 한번 만나면 진짜 엄청 챙겨주고 잘해주는 스타일이거든. 아침마다 도시락 싸주고 집에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고 그랬어. 근데 얘는 술 먹는 거 좋아하고 맨날 놀러 다니고 하는 게 안 바뀌는 거야. 그때쯤 나도 나이가 차다 보니까 결혼을 고려하게 되고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걔랑 결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다시 친구로 돌아갔어. 너 계속 이런 식으로 살면 나랑 어떻게 결혼할 거냐고. 나는 너 이런 식으로 살면 같이 못 살 거 같다고 했지"
"헤어지자니까 그냥 헤어져줬어?"
"엄청 매달렸지. 잘하겠다고 하면서. 근데 뭐 그렇게 말만 하고 결국 바뀌는 게 없으니 헤어졌지. 나중엔 자기도 수긍하더라. 난 그 후에 소개팅 엄청 많이 했어. 근데 이놈 저놈 다 성이 안 차다가 지금 남편을 만났을 때 좀 새롭더라구. 항상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이었거든. 데이트도 정확하게 계획대로 움직이고 나를 리드하니까 그게 매력적이더라고. 처음 보는 스타일이어서. 직업도 뭐 평생 먹고 살 걱정할 일 없는 직업이었고"
"아.. 근데 그 성격이 지금은 오히려 같이 살기 힘든 점이네"
"그것도 그거고 내가 이렇게 시댁 때문에 생고생을 할지 전혀 몰랐지. 결혼이 두 사람만 걸쳐 있는 게 아니고 집안까지 다 봐야 한다는 걸 어려서 몰랐어. 내가 겪은 거 다 얘기하려면 책 한 권, 책 한 권이 뭐야 다섯 권은 나오겠다"
"남사친 그 사람하고 지금도 연락해?"
"응 연락하지. 얼마 전에 둘째 낳았다고 그러더라. 그냥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해도 신기할 게 없는데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애가 결혼을 하고 애를 기르고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신기해. 그리고 얘가 이렇게 아이를 좋아하고 가정에 충실한 애인지 몰라서 더 놀랍더라고. 그때는 결혼은커녕 자기 몸 하나도 건사 못할 것처럼 보였는데"
"아 그분도 결혼하셨구나. 남편도 연락하는 건 아나?"
"당연히 모르지. 2년 전인가 잠깐 한번 본 적은 있어. 사는 얘기하고 육아 얘기하고, 우리가 어쩌다 벌써 애 엄마 아빠가 되었나 싶고"
"별일은.. 없었지?"
"무슨 별일이 있어. 차 한잔하고 말았어. 걔가 그러더라. 이번 생에는 이렇게 친구로 지내고 다음 생에 다시 만나서 꼭 결혼해서 같이 살자고"
"누나도 그러고 싶어?"
"아니, 난 그냥 결혼 안 하고 혼자 살고 싶어"
"진짜 혼자 살아도 잘 살 자신 있어?"
"그럼. 주변 사람들은 날 보며 무슨 재미로 사나 해도 난 소소한 거 혼자 만족하고 재미 느끼며 사는 사람이거든"
"그래, 혼자 살아도 요즘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누나 치과 몇 시까지 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