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경의 루브르 박물관, 폐관이 1시간 채 남지 않은 그곳 파리의 중심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값으로 매기면 가장 비싼 감상이다. 여기에 소시오패스를 데려다 앉혀 놓아도 그의 가슴이 모나리자를 품지 않을까. 25살, 20대의 중심에서 경희는 유럽의 중심 프랑스로, 그리고 거기서 파리의 중심 루브르 박물관 앞 센 강 언저리를 서성이며 다시 못 올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은 시간이기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이 시간의 분절을 모조리 새기려 자체적으로 시간을 0.2배속으로 설정하였다.
지난 1년을 떠올려보았다. 치열했던 시간이다. 엄한 아버지의 딸로서 한치의 일탈도 허용치 않은 경희의 삶은 모범생의 삶 그 자체였다. 구글 느낌 검색이 신설되어 모범생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경희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줄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저 조용히 누르고 곱게 접어 안으로 쌓아 두는 삶이었다. 나중에 그 상자가 터져나갈 것은 지금 걱정할 일이 아니다. 계속 쌓아둔다. 하지만 이제 그 여유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경희는 포착하였다. 그리고 시험을 치르고 홧김에 떠난 이곳 파리다.
그저 여행이라는 말로 이 경험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일탈이라는 말로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심장과 뇌가 한 덩어리로 합쳐져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더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아야 하나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던 터였다. 아흐 다리 입구 즈음에 서서 강을 바라보았다. 다리를 꾸미고 있는 수많은 자물쇠들. 명동타워의 자물쇠가 흉물이 되고 있다는 뉴스 기사가 떠오르면서 같은 자물쇠라며 여긴 아흐, 예술인데 거긴 흉물이네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Bonsoir"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면 조금 아래를 응시하던 경희의 시선이 자동반사처럼 왼쪽을 향했다. 정리되지 않았지만 멋을 잃지 않는 백발의 머리, 깊고 푸른 눈, 기르려는 건지 면도하지 않은 건지 판단할 수 없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예순을 조금 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며 그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경희는 그 인사가 자신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있는 사람은 경희밖에 없었고 동양인 또한 경희 혼자였다. 약간의 위화감에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프랑스어를 전공한 경희는 자연스레 인사에 답하였다.
자신이 말을 건 여자가 큰 경계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에 안심한 듯 그는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유럽 남자는 얄밉게 자연스러워. 저 나이를 먹고도 손녀뻘은 될 여자한테 수작을 거는 것 봐. 재밌네. 생각이 안으로 침식해 가던 터 갑작스러운 자극은 오히려 반가웠다. 파리에서의 경희의 풍경을 더 다채롭게 해줄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감독이라면 강을 배경으로, 그리고 강에 비친 노을의 빛으로 두 남녀의 검은 실루엣만 보이지만 숨길 수 없는 각자의 선이 나이 든 유럽 남자와 젊은 동양 여자의 모습임을 짐작게 하는 미장센일 것이다. 진부한 신이겠지만 베스트셀러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 장면을 누군가 그렇게 찍어준다면 세상에 다시없을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남자는 대화가 잠깐 멈추자 주위를 두리번대더니 근처 판매대에서 에펠탑 모양 키링을 사 왔다. 에펠탑 좋아하냐고 묻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선물이란다. 경희는 키링을 손에 쥐고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그때 조금 남자와의 거리가 아까보다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눈앞에 남자의 푸른 눈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짐작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다. 진한 향수 냄새와 꼬릿한듯한 체취가 코에 느껴졌고 경희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닿음과 동시에 그의 혀가 노련하게 경희의 입을 열어젖혔고 저항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때 그의 손은 조금 열린 경희의 점퍼 안으로 들어와 얇은 티셔츠 위로 오른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술 안으로 혀가 들어오는 1초, 2초, 그리고 3초.. 경희는 팔꿈치를 들어 그의 몸을 밀어내었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표정에서는 거절에 따른 어떠한 당황이나 두려움은커녕 프렌치 키스가 처음인 경희에게 본토의 프렌치 키스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그 후기를 기다리는 듯한 천진난만함이 보일 뿐이었다.
뭐 하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너의 입술이 너무 아름다워서 참을 수 없었다는 능구렁이 같은 답변만 돌아왔고 조금 징그러웠지만 왠지 황홀하기도 하였다. 당신 부인이 지금 당신 행동을 알면 어떻겠냐고 기계적으로 항변해 봐야 아름다운 너에게 매료됐다는 소리만 반복될 뿐. 더 이상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작별 인사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말없이 몸을 돌려 다리로 향했다. 다리를 건너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생각이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가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뇌가 방금 생긴 일을 실제인지 상상이지 구분 못하고 분류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건넜다. 어딘가 앉아 감정을 추스르고 싶은 생각에 눈에 보이는 작은 공원에 들어가 벤치에 앉았다. 아까 전보다 노을빛은 옅어지고 조금씩 어둠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차분해지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키스는 해봤네. 조금 더 젊은 사람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저 해프닝처럼, 방금 전의 일이 며칠 전의 일같이 머릿속에서 잦아들며 경희는 파리의 저녁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벤치에 앉은 프랑스인들은 무슨 할 말들이 그리 많은 지 그들 특유의 빠른 속도의 톤으로 수많은 대화를 저녁 공기로 흩어보내고 있었다.
"Bonsoir"
경희를 향한 또 누군가의 인사이다. 이번엔 안경을 쓴 갈색 머리의 마른 남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거침이 없구나. 한국에서 여름 해변가의 어리숙한 치근덕거림은 값싼 싸구려처럼 느꼈는데 유럽 남자의 추파는 왜 이리도 낭만적일까. 여기가 프랑스여서일까, 설마 나는 문화 사대주의자가 아닐까. 그건 좋지 않다고 배웠는데. 이름을 듣지도 않았지만 이 남자는 사회학 교재 어디선가 보았던 부르디외라는 이름이 잘 어울려 보였다.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할까 기대도 되었다. 손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에펠탑 키링을 가리키더니 여기에 가봤냐고 물어본다. 내일 갈 계획이라고 했더니 어디가 에펠탑을 보기 좋은 자리이며, 올라가면 어떤 풍경이보일 것이며, 근처 맛있는 식당은 어디인지 시시콜콜한 스포일러를 늘어놓았다. 말을 멈추지 않고 자신은 책을 좋아한다고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경희는 프랑스어 듣기 수업을 수강하는 느낌이었지만 그의 분위기와 경희가 멋대로 떠올린 부르디외라는 이름, 그리고 그의 직장 모든 것이 너무 잘 어울리는 하나의 패키지라 느껴졌다. 조금씩 쌀쌀해지는 저녁 공기가 왠지 모르게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거의 끝날 것 같지 않은 수다가 멈추고 잠깐 뒤 그의 얼굴이 재빠르게 경희 쪽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경희 얼굴을 잡고 앞니가 아플 정도로 입술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키스를 당했을 때 그 일은 너무나도 드문 일로, 일생에 한번 생기기 어려운 일이라 다음에 그런 일이 또 생길 것을 대비해야 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의 혀가 경희 입안을 휘감으려던 찰나 아까의 일을 기억하는 몸은 인지보다 빠르게 그를 밀쳐냈다. 그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우물거리며 또다시 키스하려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경희가 혼자 프랑스에 놀러 와서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자 그에게선 파리의 밤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는 의뭉스러운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당신이 도서관에서 책을 다루는 사람이라 해서 이런 행동은 상상도 못했다는 경희의 말에 그 부르디외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건 맞지만 자기는 도서관에서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람이란다. 그의 뻔뻔한 말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지만 거짓말 한건 없네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남자에게도 인사말 없이 작별을 고하였다. 저녁의 루브르를 보기 위해 다시 다리 쪽으로 향하였다. 천천히 걸으며 저녁 하늘을 올려다 보자 아름다운 파리가 얼룩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론 우습게도 옅은 황금빛과 분홍빛이 한데 섞인 황홀한 파리라 생각했다. 나 홀로 유럽여행에서 느끼는 이 들뜬 생경한 감정도,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파리 남자들에게 대한 원망의 감정도, 그리고 자신의 가여운 인생에 대한 연민도, 그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밤의 어둠을 품은 검은 센 강은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삼키며 여전히 찬찬히 흘러가고 있었다. 다리 중간에 멈춘 경희는 손바닥에 놓인 키링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센 강의 물결 속으로 있는 힘껏 던져버리고 루브르쪽으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