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burden) 1화

by 전야감

추운 날씨 덕에 공기는 깨끗한 2월 저녁에 수희는 걸어가고 있다. 머릿속은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5년간 몸담아온 회사와 학교 일은 매우 다르기에 조금 하다 보면 별거 아니라는 교사 친구의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휴대폰을 쳐다본다. 자기 자식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것저것 물어대는 학부모들의 문자에 어떤 내용을 어떤 투로 응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깐 몸담아 본 6개월간의 학교가 끔찍하여 이번엔 쉬기로 했다. 그러나 작년 말의 충격적인 일 때문에 쉬는 것이 맞나 고민하던 찰나 학교는 수희의 서류 제출도 받지 않고 서류전형 합격 통보 문자를 보내왔다. 큰 결격이 없는 한 기존의 사람에게 계속 일을 시키려는 조직의 특징은 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덜컥 2월 중순에 담임이 되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데 동료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수희가 이미 기존 담임을 완전히 대체한 부품인 양 대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수희의 교사 경력을 묻고 고려하여 그 요구의 강도를 조절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1교시가 끝나고 숨을 돌리며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던 중 문이 드르륵 열리며 성민이 나타났다.


“수희 샘, 나 심심한데.. 뭐해요?”

“아.. 저 지금 박정미 샘이 시간표 입력해달라고 하셔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찾아보고 있어요. 아, 정신없네”


“그거 아직 안 하셨어요? 제가 알려드릴까요?”

“샘 아세요? 어떻게 해야 돼요?


“어.. 일단 거기 누르고, 그거.. 네, 그거 클릭하고.. 마우스 오른쪽 클릭해서 과목 넣고..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가물가물하네”

“...”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요”

“그냥 제가 부장님께 여쭤봐서 해볼게요”


“그래요. 저 어제 엄마한테 혼났거든요? 차 사고 싶은데 엄마가...”


또 시작된 성민의 잡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다 양식이 있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다들 점잖고 잘 교육받았으며 예의 바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사라는 직함을 떼더라도 나잇값을 이렇게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놀랍다. 작년 6개월간의 근무가 가장 고달팠던 이유가 바로 이 인간이다. 듣기로는 병명은 정확히 모르지만 정신질환이 있다고 했다. 복무가 엉망이고 담임 업무도 제대로 수행이 되지 않아 학부모 민원이 빗발쳐 학교에 애물단지가 같은 존재가 된 미혼의 40대 중반 아저씨. 성숙하지 않은 내면 때문인지 묘하게도 동안이며 수희가 결혼한 지도 모르고 추파를 던졌던 남자.


수희는 본래 칼 같은 성격도 되지 못하지만 학교라는 커뮤니티 속에서 어색해지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싫어 자신에게 치근덕거린 이 남자와의 이런 불편한 관계를 끊어낼 수가 없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나마 편하게 학교 일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 그 대답이 대부분 틀렸다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수희는 밝았다. 항상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단어는 바보였다. 나 아무것도 모르잖아, 난 멍청해서 몰라. 그녀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170cm의 키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의 큰 눈과 새하얀 피부는 그녀의 강렬한 인상에 항상 일조해왔으나 스스로는 그런 이미지가 싫었다.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해외 체류 경험으로 자연스레 체득한 영어실력과 타고난 외모 덕에 항공사에 어렵지 않게 취직할 수 있었고 이 세상의 창공을 다니며 5년을 보냈다.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다른 항공사 소속의 그였지만 공항에서 가끔 마주치는 그의 미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희의 관심을 빼앗아 간만큼 그는 다른 스튜어디스들의 관심망에도 오르내렸고 문득 그가 2년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지만 남자를 만나는 그녀의 성미는 주변을 수소문하여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와 연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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