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불공평하다 외쳐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런 막연한 바람이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래도 이 불공평의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춰줄 거라고. 극단까지 몰려간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그의 전능한 힘을 발휘하여 수렁에서 건져줄 거라는 기대.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고 뼛속 깊이 그 전능한 존재를 아로새기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 '극단'이라는 기준은 매우 주관적인 것 같았다. 우리에게도, 그리고 신에게도.
민철은 한국에 머물러 몇 개월간 단기적인 일을 하며 가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수익을 벌어오긴 했지만 기장 자격 취득 연장을 위해 카타르에 수개월에 한 번씩 다녀와야 했다. 전염병 덕에 가뜩이나 없는 항공편의 비용과 카타르 체류 비용은 그 얼마 안 되는 수익을 까먹기 충분했다. 그렇게 3번째 카타르행을 위해 항공기에 올라탄 남편을 뒤로할 때조차도 수희의 머릿속은 내일 학교에서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고 있는 듯한 담인 반 학생의 일관성 없고 어딘가 이상한 진술을 들으며 그 어두운 기운에 자신의 감정까지 물들어 지쳐가던 차, 여전히 성민은 눈치 없이 수희를 괴롭힌다. 이제는 노크도 없이 자기 쉬는 시간이면 수희 교실로 찾아와 의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놨고 수희는 내가 당신 얘기를 듣고 있다는 약간의 얼굴 찡그림에 소모되는 칼로리도 아깝게 느껴졌다. 얼굴을 찡그리기 위해 안면의 근육에 힘을 주는 그 단계조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천진난만함과 누군가의 성장을 보며 응당 느끼는 인간의 성취감이 수희의 바쁜 뇌를 잠시 닦아주었다가도 이내 밀물에 의해 쓸려올라가는 해안선처럼,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다시 그 자리에, 그렇게 수희를 놓아버렸다.
4시 30분이면 초등학교 교무실은 일순간 비어버린다. 그 시간 즈음 잠깐 교무실 밖을 다녀오기라고 한다면 나가기 전과 지금 여기가 같은 공간인가 싶을 정도의 모습이다. 수희는 잦은 야근 탓에 이제 그 생경함도 익숙하다. 저녁 시간을 놓친 채 머릿속에 다 잡히지 않은 일을 그대로 집으로 들고 온다. 지금 이게 내가 하는 일이 맞나라는 의구심인 문득문득 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누구에게 따져 물으며, 따져 묻는다고 내 일이 덜어질 확률이 얼마나 클 것이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말을 꺼내는 부담감 자체가 컸기에 그저 수희는 떠안을 뿐이다.
띠리리링-
남편의 전화다. 이틀에 한 번쯤은 카타르에 있는 남편과 통화를 한다. 6시간 시차의 카타르로 저녁 시간에 점심 식사 안부를 묻곤 한다.
"응 자기야, 밥 맛있게 먹었어?"
"어.. 응.. 그냥 안 먹었어"
"왜 안 먹어. 좀 물리더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그냥 안 먹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안 먹는 게 낫다는 게 무슨 말이야?"
30분간의 통화로 수희는 머릿속의 마지막 가느다른 실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있던 노트북 모니터가 묘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30분간의 통화 동안 수희가 한말은 거의 없었다.
주식 폭락, 가상화폐 폭락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가끔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서 보았던 뜻도 모를 붉은색, 파란색 차트들. 나와는 상관없고 누가 그렇게 저기에 손을 대고 폭락을 겪고 인생이 나락으로 가는 걸까라는 생각을 스치듯 했던 기억이 났다. 남편이 코인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기장을 준비하며 벌이가 없기에 어떻게든 수익을 내보겠다는 생각에 500만 원 정도의 돈을 가지고 몇 배로 불려보겠다며 호기를 부리던 남편이었다. 그런 쪽을 잘 모르기도 했고 기대도 없었지만 얼마 후 큰 폭락에 수중에 몇십도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으나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하곤 마음속에서 치워버렸다.
지금 남편이 손댄 금액은 그때와 비할 금액이 아니었다. 기장 준비에 필요한 1억. 우리 아빠가 사위를 위한다며, 딸을 위한다며 마련해 준 1억이라는 돈이었다. 그 돈을 수희 통장에 넣어 관리하지 않은 것은 그게 감히 건드릴 수 있는 돈인가 싶어서였다. 통장에 100,000,000₩이 찍혀있어도 그 돈은 마치 보이지 않은 결계가 있어 송금 버튼을 누를 수도 없고, 아니 누르더라도 그 기능이 활성화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돈의 본래 목적이 아닌 곳에는 쓰일 수가 없는 돈인 것이다.
남편 말로 그 돈이 다 없어졌다고 했다. 코인 선물거래에 손을 댔고 그 거래는 그저 순식간에 있는 돈이 다 없어질 수도 있는 거래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1억이 다 없어졌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은 정말로 돈이 없어 머무를 곳도 없고 밥을 사 먹을 돈도 없다고 했다. 자기 말로는 돈이 있어도 감히 자기가 무슨 낯짝으로 거기에 그 돈을 쓸 수 있겠느냔다. 돈으로 인한 충격이 잠시 사라지고 남편이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살고 있냐고 지금 어디냐고 다그쳐 물었다. 문득 수희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드는 스스로가 싫었을 뿐이었다.
"지현아, 그래서 지금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거든. 결혼하면 그냥 잘 살게 될 줄 알았어. 근데 요즘 나도 내가 아닌 거 같아. 돈 가지고 그러기 싫은데 하나하나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싫고 갈수록 지치는데 내가 가장이 된 기분이라 멈출 수도 없어. 그냥 모른 척 이대로 끝내고 싶은데 또 죄책감 때문에 연락도 잘 안 하고 혼자 뭐 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미치겠어. 너무 싫은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마음고생 너무 많이 했겠네. 요새 일한다고 정신없어 보여서 참 안타까웠는데 더 큰일이 있었구나. 어깨에 짐이 너무 무겁겠다. 네가 이런 일을 겪을지 상상도 못했다 정말."
오랜만의 친구와의 만남에 마음의 짐을 털어놓았지만 그 자리에 마음 편히, 오래 있을 수 없는 수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