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잠깐 차안에서 얘기할까요?
서울 남녀의 단상
남자는 결혼 생각이 없다. 36살의 나이, 나무랄것 없는 커리어 패쓰에 잘가꾼 외모,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는 감각의 소유자. 하지만 남자는 결혼 생각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만난다. 다수의 여자를. 서울은 그런 곳이다. 무한인간리필. 인간의 만남이란 횟수 차감의 성격이 있지도 않고 누가 누굴만났는지 서로 알길이 없기에 사실상 무한하다. 본인의 매력이 계속된 만남을 유지할만큼 충분하다면.
그녀는 38살이다. 어릴적부터 예술을 전공했고 뮤지컬 배우로 활동한다. 이제 문득 듬직한 남자를 만나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느 예체능 종사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듯 그녀도 말한다.
"같은 업계 사람은 안만날거에요"
그 말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다보니 화려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은 생각보다 속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 그들에게 불꽃같은 영감을 얻고 영화같은 연애를 했지만 끝은 항상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본인도 적극성을 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대 때 남자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습성을 30대 중반까지 유지했었다. 그때까지 남자는 계속해서 다가왔다. 불과 최근까지도. 그러나 그 남자들의 퀄리티는 예전과 현저히 달랐다. 또는 그들의 의도는 저열하고 뚜렷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다. 이제 내가 움직일때라고.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지방사람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수많은 채널을 통해 서로 알고 만난다. 몇년전까지 어플로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동반된 미묘하고 불편한 시선은 이제 다 녹아 없어진지 오래다. 어떤 두 사람에게 어떻게 만났냐고 물었을 때의 답변으로 SNS의 DM이 소개팅에 필적하거나 압도하는 시대이다. 어찌됬든 이 두 남녀는 만났다. 서로의 고급진 신상이 인증되어야만 가입할수 있는 어플상에서, 한명은 arrogant하게, 다른 한명은 desperate하게.
여자가 본인의 일상을 올려놓은 게시물에 남자가 가벼운 관심의 댓글을 달았다. 남자의 간단한 신상정보와 사진을 확인한 여자는 쪽지를 보내기 위한 유료결제를 마다않고 그에게 관심의 답을 보냈다. 기본적인 인사말이 오고가고 서로 결격사유는 찾지 못했기에 만남을 위한 일정을 조율하였다. 뮤지컬 연습으로 퇴근이 늦는 여자는 최대한 남자의 스케쥴과 장소를 배려하여 남자쪽 장소 근처 카페에서 이틀 뒤 밤 10시에 만남을 가지기로 약속하였다.
익숙한 장소에서 자신만의 수많은 패턴과 시뮬레이션이 이미 체화된 남자는 여자라는 투입만 주어지면 매우 높은 확률로 유의미한 결과를 산출해왔다. 굳이 연상을 만나는 선택은 자주 하지 않았으나 사진에서 느껴지는 조작이 많아 보이지 않는 여자의 뛰어난 외모와 뮤지컬 배우라는 특이점은 남자의 궁금증을 강렬하게 자극하였다.
날이 되어 둘은 만났고 몇초간의 스캔 후 속으로 서로의 외모에 합격점을 주고 그 다음단계로 나아갈 채비를 하였다. 여자는 남자가 배우자로서 적절한지 확인하기 위한 인터뷰를 준비했으나 남자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여자는 물었다. 어떤 직장에서 일하는지.
남자는 답했다.
여자는 물었다. 어떤 여자가 이상형인지.
남자는 답했다.
여자는 물었다. 어떤 결혼 생활을 생각하는지.
남자는 답했다.
남자는 여자의 외모를 칭찬하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왜 같은 업계에서 남자를 만나지 않았고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변론을 들었다. 남자는 자신의 결혼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결혼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이기에 수많은 조건을 사전에 철저히 검증해야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 중 특히 여성의 외모, 더 자세히 이르자면 성적 매력은 타협불가한 조건이기에 이 여자를 선택했다는 것에 강력하고 타당한 근거가 되어야함을 피력했다. 대화가 깊어지며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항목을 다루기 위해 남자의 화술은 조심스러워지고 교묘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불편할 정도로 뚜렷했던 남자의 언어가 두루뭉술해짐을 느낀 여자는 남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저는 관계가 진전되기 전에 여러가지 것들이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가 메이드된 후에 그런 점에 대해서 불만이나 문제가 생기면 서로의 시간 낭비기도 하고, 우리를 놓고 봤을때 솔직히 저보다는 XX씨가 더 시간적으로 촉박하다고 생각해요"
"아.. 이런 말은 처음 들어서 조금 당황스럽네요"
"네 불편해하실수도 있고, 이런 주제를 원치 않으시면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XX씨가 너무 아름다우시고, 제가 이점에서 마음이 끌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거에요."
"..."
여자는 생각에 빠졌고 잠시동안 대화는 중단되었다. 이내 결심 한듯 여자는 남자에게 말하였다.
YY씨, 그럼 잠깐 차안에서 얘기할까요?
두 남녀는 카페에서 나와 여자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같은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하였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와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최근 스킨십 경험에 대해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고 그의 기준에 대한 확인작업에 돌입하였다.
잠시 뒤 남자는 겉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여자의 모습에 대해 칭찬을 하였고 여자는 약간의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그 칭찬에 작게나마 화답하였다. 남자의 결혼관과 조건에 대해 자신도 완전히 준비가 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알리며 여자는 그곳을 떠났다.
남자는 어제밤 내내 함께 있었던 25살의 여자와 지금 떠난 여자의 여러가지 차이를 느끼며 자신의 속물스러움을 조금은 한탄했으나 핸드폰을 열어 내일 만날 또 다른 여자와 대화하며 또 다른 설렘에 그 마음을 이내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