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 케이츠의 '리치몬드 연애 소동'

기록도, 기억도,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by 손윤

1980년대 중•고교를 다닌 세대에게는 ‘아이돌’과 같은 미녀 3인방이 있었다. 잡지 사진 등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써서, 이른바 '3대 책받침 미녀'로 불린 그들. 브룩 실즈와 피비 케이츠, 그리고 소피 마르소다. 실즈가 백인 미녀의 전형이라면, 케이츠는 동양과 서양이 혼합된 듯한 신비감이 있었고, 마르소는 우수에 젖은 눈망울이 매력적인 프랑스 요정과 같았다. 각자의 매력 포인트는 달라도, 청순함과 풋풋함이라는 절대무기의 소유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피비 케이츠의 데뷔작은 17살 때 찍은 '파라다이스'(Paradise/1982년). 내용은 브룩 실즈의 '블루 라군'의 아류작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다만 무대가 무인도에서 사막으로, 또 추적물적 요소를 가미한 게 특징적이다.


그녀는 그해, '리치몬드 연애 소동'(Fast Times At Ridgemont High/1982년)라는 또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당시 미국 고교생의 현실을 다룬 청춘물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후에 명성을 떨치는 배우가 여럿 출연한 것에 있다. 숀 펜, 제니퍼 제이슨 리, 저지 레인홀드, 포레스트 휘태커, 니콜라스 케이지, 에릭 스톨츠, 안소니 에드워즈 등등. 지금 이 배우들로 영화를 찍으면, 아마 영화사가 파산할지도.



다만 아쉬운 것은 피비 케이츠가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는 점. 그래도 숨 막히는 비키니 장면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소장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영화에서 야구가 몇 군데 등장한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첫 경험을 하는 곳은 야구장 더그아웃이다. 더그아웃은 필드보다 한두 계단 내려간 곳에 설치되어 있다. 필드와 같은 높이인 벤치와 달리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사랑을 나누기에 딱 좋은 장소인 듯하지만, 제니퍼 제이슨 리에게는 그다지 좋은 장소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제니퍼 제이슨 리의 오빠역을 맡은 이가 저지 레인홀드. 그가 한번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저지를 입고 등장한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남캘리포니아인데, LA 다저스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도 아닌 클리블랜드라니! 레인홀드가 맡은 역이 다소 엉뚱한 캐릭터인 만큼, 인디언스인 게 어울리는 느낌도 든다.


어쨌든 저지의 등 번호는 '9'. 그 당시 클리블랜드에서 9번을 단 선수는 론 해시다. 그는 1978년 인디언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뒤, 시카고 컵스와 뉴욕 양키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거쳐 1991년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주된 포지션은 포수. 1980년 타율 3할(0.318)과 OPS 0.836을 올리는 깜짝 활약도 펼쳤지만, 대부분 팀에서 2번째 포수를 맡았다. 즉, 주전이 아닌 백업.


그런 그도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유일한 퍼펙트게임을 2차례나 리드한 포수이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 시절인 1981년 5월 15일 렌 바커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할 때도, 선수로 마지막 시즌이던 1991년 7월 28일 데니스 마르티네스가 LA 다저스를 상대할 때도 1회부터 9회까지 줄곧 공을 받았다.


무명이지만 화려한 순간이 있는 론 해시. 반면, 피비 케이츠는 화려하지만 대표작은 없다. 피비 케이츠라고 했을 때, '그렘린'(Gremlins/1984년)이 떠오르지만 극 중 비중도 그렇고 그녀의 영화는 아니다. 야구로 치면 기록보다는 기억에 남는 선수다. 그것은 론 해시도 마찬가지. 전혀 다른 듯한 두 사람. 결과적으로는 닮은꼴이기도 하다.


야구계에는 짧거나 긴 야구 인생 속에서 한순간 활활 타오른 선수도 있다. 한때의 영광. 그러나 세간은 변덕쟁이다.


화려할 때는 천하의 영웅처럼 떠받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장점보다 단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다음 대상에게 매혹된다.


그렇게 시간이 한 세대쯤 지나면, 뚜렷한 결과물(성적)을 남긴 게 없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된다. 왜냐하면, 그 선수와 함께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세간의 속성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기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록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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