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대출을 마무리하고 미용실에 갔다. 머리는 나이가 먹을수록 빨리 기는 건지, 요즘 들어 부쩍 자란 것 같다. 멍하니 거울 앞 기계 소리를 듣고 있는데, 주말드라마인지 아침드라마인지, TV에서 대사가 들렸다. 딸이 아버지의 우울증 약봉지를 발견하고는 슬퍼하는 장면. 딸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된 거냐고 묻자, 아버지가 "6개월 정도 됐다"고 대답했다. 아... 우울증이 저렇게 온 가족이 슬퍼할 일인가. 생각이 들면서, '난 약 먹은 지 6년이 다 돼가는데' 하고.
어딜 6개월 가지고 유세를 떠냐고, 혼자 속으로 헛소리를 했다. 안 좋은 기억은 정말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했던 그 모든 잘못된 선택들이, 지워지지 않는 퇴적층처럼 차곡차곡 쌓여서, 점점 나를 수면 아래로 잠기게 하는 건 아닐까.
재미없는 말장난처럼 점점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되어, 난 머리를 자르고 온 뒤로 16시간은 내리 수면을 취했다. 낮잠을 그다지 자는 타입이 아닌데, 보통 우울증이 심해지면 길게 잠을 잔다. 이것도 뭐 일종의 일상 도피라고 보면 될 것이다.
우울증이란 게 그렇다. 자꾸 과거에서 잘못을 찾게 만들고,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지게 한다.
최근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을 쓴 백세희 작가님이 돌아가셨다.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울을 그저 관념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저분한 과정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다니. 우울증을 터부시하는 이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까지 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작가님의 사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사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만 해본다. 우울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뭐랄까, 불행한 기운을 먹고 사는 기생충. 그런 느낌인 건가.
나도 최근 우울증 치료가 진전이 없어서 영 머리가 아프다. 이 지긋지긋한 놈은, 도대체 언제쯤 나를 놓아줄까.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