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봤던 영화를 굉장히 또 보는 스타일이다. (웃긴 게, 한번 봤던 책은 절대 다시 안 펴본다.) 오랜만에 <칠드런 오브 맨>이란 영화를 다시 보았다. 배경은 2027년, 전 인류가 불임이 되어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세상. 뉴스는 세계 최연소 인류였던 18세 소년이 사망했다고 호들갑을 떨고, 거리는 폭동과 테러로 무너져 내린다. 미래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멸종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설정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주인공 테오의 모습이었다. 그는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이 아니었다. 폭탄이 터지는 거리에서도 그저 줄을 서서 커피를 사고, 맛없는 술을 마시며 무기력하게 하루를 때우는, 찌들고 지친 공무원이었다. "당신은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냥 안 죽어서 산다"고 대답할 것 같은 그 건조한 얼굴. 그 얼굴이 묘하게 거울 속의 나를 닮아 있었다. 나 역시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약을 털어 넣고, 멸망해가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꾸역꾸역 출근을 하니까. 내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 당장의 카페인은 필요한, 그 관성적인 삶의 비루함이 사무치게 현실적이었다.
영화 중반, 기적처럼 아이가 태어난다. 그것도 가장 비천한 곳, 불법 체류자 난민 소녀의 몸에서. 테오는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평생 피하고 도망쳤던 세상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후반부다. 폐허가 된 건물 안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기적처럼 사격이 멈춘다. 피 묻은 군인도, 분노에 찬 반군도, 그 핏덩이 같은 생명 하나를 보겠다고 길을 터준다. 그 짧은 순간의 정적과 경외감.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기가 건물을 빠져나가자마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총을 쏘고 서로를 죽인다. 그게 인간이다. 감동은 찰나고, 전쟁과 밥벌이는 영원하다. 나는 그 장면이 끔찍하면서도 너무나 납득이 갔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영화의 결말은 잔인하고도 아름답다. 테오는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아기를 태운 쪽배를 바다로 밀어 보낸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미래호라는 배다. 인류를 구원할 프로젝트가 있다는 그 배. 하지만 안개가 자욱해 배는 보이지 않는다. 테오는 배가 오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보통의 영화라면 웅장한 음악과 함께 거대한 배가 나타나 그들을 구조하는 장면을 보여줬겠지만, 이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테오는 자신의 눈으로 희망을 확인하지 못했다. 내 희생이 보상받는 장면,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저 그 배가 올 것이라고, 저 안개 너머에 분명히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죽었을 뿐이다.
나도 가끔 내 인생의 결말이 궁금해 미칠 때가 있다. 이렇게 아등바등 버티면 볕 뜰 날이 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이렇게 닳아 없어지다 끝나는 건지. 확인받고 싶다. 보장받고 싶다.
"네가 지금 흘리는 이 땀과 눈물은 나중에 다 보상받을 거야"라는 확실한 계약서를 원한다.
하지만 테오의 죽음을 보며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건,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믿는 게 아니다. 안개 속에 가려져 있어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있다고 믿고 내 몫의 노를 저어가는 것. 테오가 마지막에 그토록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건, 배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는 내 손을 떠났고,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노를 저었다는 그 사실 하나.
내 인생에 미래호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른다. 어쩌면 나는 평생 안개 속에서 표류하다가 끝날지도 모른다.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을 수도 있고, 내 삶은 여전히 건조하고 팍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커피를 마시고, 출근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묵묵히 글을 쓴다.
결과를 확인하지 못해도 괜찮다. 성공한 인생이라는 증명서를 받아 들지 못하고 눈을 감더라도, 최소한 비겁하게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 내가 믿는 방향으로 묵묵히 노를 저었다는 것. 그거면 된 거다.
안개는 여전히 짙지만, 나는 오늘도 노를 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