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남자가 연출하는 가짜 가족극
내가 모시는 대표는 대단한 사람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로 태어나, 황무지였던 분야를 개척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1세대 지식인. 위인은 아니더라도 그의 족적은 실로 거대하다. 물론, 그 거대한 족적 아래 깔려있는 실체를 보는 직원 입장에서는 그저 '막돼먹은 꼰대'일 뿐이지만.
그는 사람이 왜 쉬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50이 넘은 부장도 쩔쩔매며 겨우 휴가를 쓰는 판국이니 말 다 했다. 평생을 의전 속에 살아온 그는, 시대가 변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왕처럼 군다. 처음엔 그저 '구시대의 악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입체적이다.
요즘 나는 운전대를 잡는 일이 잦아졌다. 주말에도 "일이 있다"며 직원을 불러내는 그 덕분에, 나는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그를 훔쳐본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굳이 직원들을 끌고 다니는 그의 얼굴. 거울 속의 그는 성공한 개척자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 발악하는 외로운 노인이다.
술자리는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은 '사이코드라마' 무대가 된다. 배역은 철저하게 정해져 있다. 머리 희끗한 50대 부장은 '철없고 눈치 없는 조카'. 깐깐한 국장은 '잔소리 많은 여동생'. 싹싹하게 비위를 맞추는 대리는 '애교 많은 막내딸'. 그리고 묵묵히 고기를 굽고 운전을 하는 나는, '듬직하고 과묵한 장남' 역이다.
우리는 모두 '월급'이라는 출연료를 위해, 이 기괴하고 이질적인 가족 놀이에 충실히 복무한다. 다들 이 연극을 통해 얻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사회적 발판이든, 조금 더 편한 회사 생활이든. 나 같은 경우엔 기냥, 적당히 비위 맞추고 받는 월급이면 족하다.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대리와 나를 데리고 마트에 갔을 때였다. 대표는 카트에 술과 안주를 쓸어 담으며 호탕하게 웃었고, 대리는 "대표님, 이거 사요!"라며 딸처럼 장단을 맞췄다. 나는 그 뒤에서 묵묵히 짐꾼처럼 카트를 밀었다.
남들이 보기엔 영락없는 아빠와 딸, 그리고 듬직한 아들로 보였을 것이다. 가짜 가족이 완성된 그 순간, 그는 진짜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외로움을 잠시 잊은 듯했다. 그 찰나의 행복한 미소가 묘하게 역겨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가족이 없는 게 아니다. 번듯한 아내도, 좋은 대학과 직업을 가진 자식들도 있다. 그의 성공은 그들에게 풍요로운 집과 차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위해 가정을 땔감으로 써버렸다. 가장으로서의 존경은 남았을지 몰라도, 사랑과 애정은 이미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듯했다. 가정을 위해 살았으나, 정작 가정에 설 자리가 없는 남자의 최후.
스스로도 알 것이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어디서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된 건지. 하지만 주말에 굳이 술을 먹겠다고 나를 불러내 운전을 시키는 꼬라지를 보면, 참 막돼먹고 엉망인 인간임은 틀림없다.
백미러 속, 잠든 그의 얼굴이 측은해 보이다가도 문득 정신이 든다. 주말까지 반납하고, 남의 가짜 아들 노릇을 하며 핸들을 돌리고 있는 나.
도대체 누가 누굴 동정하고 있는 건가. 사실 제일 불쌍한 건, 지금 여기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나인데.
세상엔 노력하면 다 될 것 같지만, 때를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오늘도 남의 가족 놀이에 끌려와 핸들을 돌리며 뼈저리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