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고민 끝에 우리는 딩크라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동안 늘어놓았던 돈, 집, 유전, 사회적 구조 같은 복잡한 이유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의 가능성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면 대단한 변화가 생길 줄 알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단조롭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반겨주는 아이의 웃음소리 대신 건조한 공기가 먼저 맞이한다. 누나 집이나 친구 집 거실을 점령한 그 눈 아픈 총천연색 층간소음 매트 따위는 이곳에 없다. 오직 차가운 무채색의 인테리어만이 여기가 아이 없는 집, 바로 나의 집이라는 사실을 건조하게 알려줄 뿐이다.
가끔은 그 적막이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거나 멍하니 천장을 본다. 주말 아침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늦잠을 잔다. 식탁 위에는 장난감 대신 밀린 고지서와 영양제가 놓여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현실의 풍경이다.
우리는 이제 거창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현재를 버티는 데 주력한다.
누군가는 우리를 보며 미래가 없는 삶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유전자는 내 대에서 끊길 것이고 내가 죽으면 나를 기억해 줄 직계 비속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명확한 숙제가 있다. 바로 늙어갈 우리 두 사람의 존엄이다. 자식이라는 노후 보험을 포기한 대신 우리는 철저하게 남남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그 무게를 알기에 전보다 더 악착같이 저축하고 건강을 챙긴다. 나중에 내 기저귀를 갈아줄 간병인 비용은 내가 벌어놔야 하니까.
가끔 명절에 만난 조카들이나 주말에 보는 친구들의 자식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귀엽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 뒤에 서 있는 누나와 친구의 얼굴을 더 유심히 본다.
누나는 이런 선택을 했구나. 내 친구는 이런 선택을 했구나.
그들은 소란스러움과 책임감을 선택했고 나는 고요함과 단절을 선택했다. 그들은 나보다 용감했거나 혹은 나보다 무모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나 역시 내가 고른 이 적막을 견뎌야 하듯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누가 보지도 않는 이 글을 꾸역꾸역 쓰는 이유도 결국 마찬가지 아닐까.
나를 기억해 주거나 제사를 지내줄 직계 비속은 없다. 훗날 내 묘지를 찾아올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하찮은 글이라도 남겨서 가죽이라도 남겨놔야 하는 것이다. 유전자를 통해 영생할 수 없으니 텍스트 쪼가리라도 남겨서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서글픈 본능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결정이 완벽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완벽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그저 수많은 오답 중에서 우리가 가장 덜 고통스러울 오답을 골랐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도 이 조용한 10평 집에서 필라이트 한캔을 딴다. 낭만은 없다. 그저 우리가 선택한 이 고요와 적막을 끝까지 책임지며 묵묵히 늙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