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일지
딩크에 대해서 이제 글을 다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이런 일이 있었다. 그래, 뭐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겠냐 싶긴 하다. 아내의 회사가 위태롭다는 소식은 요란한 폭발음이 아니라 아주 조용하고 묵직한 가라앉음으로 찾아왔다. 조직의 침몰을 이미 여러 번 목격해온 나였기에, 그 소식이 가져다주는 서늘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제 우리 집을 지탱하는 유일한 동력원이 내 월급봉투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외벌이라는 단어가 거실의 정적 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혹시나 하는 상황이 와버려서 서울이 아닌 지방으로 내려가는 선택지도 생겼고, 남은 전세 계약은 얼마큼 남았으며, 또한 전세 계약금은 받을 수 있는지, 언제 받는지, 집이 나가야 받을 텐데 그 시간 동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복비는 얼마나 나올지. 이런 내용들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감상에 젖기보다 계산기를 먼저 두드려야 하는 밤이었다.
보통의 가정이라면 이 대목에서 당장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매달 빠져나가는 고정 지출과 아이의 미래를 담보로 잡힌 수많은 비용이 목을 죄어왔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밤, 내가 느낀 것은 절망보다는 기묘한 안도감이었다. 우리가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삶의 배낭에서 가장 무거운 부채를 미리 덜어내 두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기 때문이다.
가끔 딩크라는 것은 단순히 사랑을 나누는 부부를 넘어, 큰 위험을 헤치고 나가는 항해 동료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안위를 챙기는 것 이상으로, 이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노를 저어야 하는 생존 공동체. 아이라는 매개체 없이도 우리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것은, 이 거친 풍랑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구명보트라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유대감이다.
우리가 짊어진 짐이 가벼웠기에, 한쪽 엔진이 꺼져도 당장 추락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여백이 우리에겐 남아있었다. 세상은 아이가 인생의 보험이라 말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내가 발견한 진실은 달랐다. 우리에게 딩크라는 선택은 미래를 위한 저축이 아니라, 당장 오늘 닥친 풍랑 속에서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해주는 낮은 무게중심이었다. 누군가는 이를 이기적이라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성실함이다. 내가 내 삶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무게를 지는 것. 그래야 항해 동료인 아내의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 노를 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성적표는 이제 식탁 구석에 던져두기로 했다.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그들의 예언은 늘 미래형이지만, 우리가 마주한 외벌이의 위협은 지독한 현재형이다. 닥치지 않은 노후의 고독보다 무서운 것은, 당장 내일을 버텨낼 에너지가 바닥나는 현재의 파산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고, 그 한계 안에서 서로를 온전히 지켜내기로 했다.
아내의 지친 얼굴 위로 식탁 등 조명이 떨어진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없지만, 우리는 이 고요한 정적 안에서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외벌이라는 파도가 덮쳐와도, 우리가 선택한 이 얇고 단단한 삶의 방식은 쉽게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비로소 살아남았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