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비판조차 스펙이 필요한 세상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습관적으로 브런치를 연다. (사실 혹시나 내 브런치의 조회수나 구독자가 늘었나 확인하러 들어간것이다) 메인 화면을 장식한 글들을 타고 들어가 작가들의 프로필을 구경하다 보면 금세 눈이 시려온다. 그곳은 흡사 거대한 훈장 전시장 같다.
이름 석 자 옆에는 어김없이 화려한 수식어들이 따라붙는다. 해외 명문대 석사 출신 혹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팀장이나 수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스타트업의 창업자들. 그들은 서너 개의 직함을 동시에 저글링하며 세상을 바꾸는 인사이트와 인생의 정답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들의 프로필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설계된 인생의 완성본이자 누군가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성벽처럼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나의 작가 소개란은 민망할 정도로 황량하다. 서른여섯 살의 평범한 직장인. 더 적을 말이 없어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마침표 하나 찍고 창을 닫았다. 자기피알이 생존인 시대라는데 나는 나를 포장할 가공법을 모른다. 사실은 포장지 안에 담을 알맹이가 마땅치 않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높은 학력이나 특별한 전문직 경험 혹은 남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대단한 경력이 내게는 없다. 9평 전세방에 몸을 누이고 내일 아침 지하철 개찰구에 찍힐 1,500원의 요금을 걱정하는 사내가 적을 수 있는 이력서란 대개 그런 식이다. 빈칸이거나 아니면 적으나 마나 한 시시한 사실들의 나열뿐이다.
그들의 글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문장 하나를 읽으면 무언가 대단한 정보를 얻은 것 같고 일상을 사유하는 그들의 깊은 철학에 감탄하게 된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하라"는 지침이나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거창한 담론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내 글을 본다.
거기에는 지하철역에서 느낀 한기나 알리익스프레스같은 싸구려에 대한 집착 그리고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에 대한 허무함만이 가득하다.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내 글을 본다고 해서 독자들이 대단한 지식을 얻어갈 리 만무하다. 재테크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는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지도 않다. 나의 기록은 그저 반복되는 생존과 무의미한 저축으로 점철된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일기일 뿐이다.
이런 시시한 글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필연적으로 분노의 자격 문제로 이어진다. 가끔 뉴스에서 터져 나오는 사회적 부조리나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보며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향해 일갈하고 싶고 이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는 글을 써 내려가고 싶다.
하지만 이내 그 분노를 삼키고 입을 닫는다. 비판이라는 고상한 행위조차 결국은 자격이 있는 놈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서글픈 깨달음 때문이다.
소위 서울대를 나오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지식인이 세상의 모순을 꼬집으면 그것은 시대의 통찰이자 날카로운 비평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무게를 두고 그 비판 속에 담긴 대안을 경청한다.
하지만 나처럼 서울 바닥에서 간신히 하루를 버티는 평범한 직장인이 세상을 비판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상은 그것을 비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사회에 불만이 많은 루저의 투덜거림이나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놈의 비겁한 신세 한탄으로 치부할 뿐이다.
"그렇게 세상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전에 네 인생부터 똑바로 세워라"
누구도 내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무언의 압박을 나는 안다. 이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으려면 일단 성공이라는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단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뱉는 분노는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소음일 뿐이다. 멋진 스펙이 없는 자의 분노는 불온한 불평이 되고 화려한 이력이 뒷받침된 분노는 정의로운 외침이 된다. 그래서 나는 거대 담론을 논하지 않는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잘난 놈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나의 시야는 고작 9평 방 안과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길 지하철 노선도에 갇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비판은 웬지모르게 비싸진 계란값에 대해 툴툴거리거나 오르기만 하는 교통비에 한숨을 내쉬는 정도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는 대신 내 방 구석에 결로 생긴 핀 곰팡이를 닦아내며 세상의 척박함을 체감할 뿐이다.
나의 문장에는 화려한 스킬도 없고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기막힌 비유도 없다. 멋진 비유를 써보고 싶어 밤새워 고민하다가도 결국 내가 고르는 단어들은 밥벌이나 전세 대출 같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구질구질한 것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이 초라한 문장들을 이어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주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기대 때문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저 화려한 프로필의 주인공처럼 살 수는 없다.
누군가는 높은 빌딩의 통유리 너머를 보며 거대 담론을 논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빌딩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카드 잔액을 확인하며 한숨을 쉰다. 나는 그 후자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나의 글은 정보도 없고 교훈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지옥 같은 평범함 속에서 나만 혼자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인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대단한 성공담보다 "나도 당신처럼 비겁하고 찌질하게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누군가에게는 더 큰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기댄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이자 비겁한 변명이다.
모두가 똑똑하게 세상을 비판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나처럼 사회에 불만 많은 놈 취급을 받더라도 자신의 시시한 고통을 기록해야 한다. 스펙이 없어 자격 없는 분노라 할지라도 내가 느끼는 이 답답함만큼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멋진 비유 하나 없는 투박한 문장으로 내 하루를 기록한다. 세상이 내 글을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루저의 낙서라 부른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내가 살고 있는 이 좁은 세계의 온도를 정식으로 적어 내려갈 뿐이다.
화려한 빛은 없어도 이 어두운 기록들이 누군가의 그늘진 마음과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얻어갈 정보는 없어도 잃어버린 동질감 정도는 챙겨갈 수 있는 그런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위안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울지 모르지만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참 나랑 비슷하게도 사네"라고 혼잣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화려한 이력서들 사이의 빈칸은 그렇게 평범한 문장들로 채워진다.
작가라고 불리기 민망한 나의 기록은 내일도 반복될 것이다. 6만 원의 교통비가 찍히고 중국냄새가 나는 택배를 기다리는 그 시시한 일상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