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는 없는 날짜다. 그런데 체감상으로는 분명 존재한다. 12월이 끝났다고 말하기엔 마음이 아직 남아 있고, 새해라고 부르기엔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하루. 그래서 나는 이 날을 12월 32일이라고 부른다.
회사에서는 이미 몇 번이나 날짜를 틀렸다. 결재 서류 끝에 습관처럼 2025라고 썼다가 지운다. 아직 2024인데, 손이 먼저 넘어간다. 미래를 앞서 쓴 것도 아니고, 그냥 헷갈린 거다. 연말도 아니고 새해도 아닌 상태가 손끝에 남아 있다.
새해 인사도 애매해진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기엔 좀 늦은 것 같고, 안 하자니 괜히 정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다들 말끝을 흐린다.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같은 문장으로 우회한다. 인사의 유효기간이 이미 지나버린 것 같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
책상 위에는 새 달력이 와 있다. 비닐도 안 뜯은 채로. 벽에는 아직 12월 달력이 걸려 있다. 바꿔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룬다. 달력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내가 게을러서다. 새해를 완전히 들여오고 싶지 않은 마음. 아직은 작년 쪽에 발 하나 걸쳐두고 싶어서.
12월 32일에는 다들 애매해진다. 계획은 세웠지만 실행할 기운은 없고, 반성은 했지만 교훈까지는 못 갔다. 새 다이어리를 펼쳐놓고도 첫 장을 바로 쓰지 못한다. 오늘은 아직 아니라고, 오늘은 좀 애매하다고.
그래도 하나쯤은 남긴다. 내년 목표를 아예 안 세울 수는 없어서, 아주 작은 걸 하나 적어본다. 술을 줄이는 것. 한동안은 목표 자체를 잡지 않았다. 정해봤자 못 지킬 것 같아서. 그래서 이번에는 거창하게 금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단어는 나한테 너무 크다. 대신 줄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횟수든, 양이든, 이유 없는 한 잔이든.
아마 몇 번은 실패할 것이다. 흐지부지될 날도 있을 거다. 그래도 괜찮다. 12월 32일에 세운 목표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나온 결심. 지키지 못해도 크게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약속.
12월 32일은 그런 날이다. 아무것도 새로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 하루. 나는 오늘도 달력을 넘기지 않은 채로 하루를 보낸다. 날짜 하나를 마음속에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