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2026 : 원고는 자녀, 피고는 부모

내가 망할 권리에 대한 청구 소송

by 야호너구리

재판장님. 원고는 나입니다. 피고는 엄마와 아빠입니다. 원고는 오늘, 피고들이 내 인생에 행사한 권한과 그 결과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돈이 목적은 아닙니다. 돈으로도 안 됩니다. 다만 이 사건은 “우린 너 위해서”라는 문장 하나로 종결되기에는 너무 오래 지속됐습니다.


첫 번째 청구 원인. 진로 개입. 피고들은 원고가 선택지를 말하기 전에 선택지를 삭제했습니다. “대학은 나와야 한다.” “공고는 안 된다.” “그 일은 별로다.” “그건 도망이다.” 이 문장들은 조언이 아니라 판결이었습니다. 원고가 반박을 시도하면 “말대꾸”로 정리됐습니다. 변론권은 인정되지 않았고, 항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증거자료 1호. 반복 진술. 피고들은 같은 문장을 여러 해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규칙이 됐습니다. 원고는 그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죄인이 되는 구조에서 자랐습니다. 죄목은 불효였습니다. 불효는 법전에 없는데, 집 안에서는 실형이었습니다.


두 번째 청구 원인. 결과 회피. 피고들은 방향을 제시했으나 결과를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그땐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우린 너 위해서.” “키워줬잖아.” 피고들은 매번 마지막 문장으로 재판을 종료했습니다. 이 문장들은 면책 조항처럼 사용됐습니다. 원고의 실패는 원고의 성격이 되었고, 원고의 망설임은 원고의 결함이 되었습니다. 피고는 조언자였고, 원고는 항상 당사자였습니다. 책임은 늘 원고 쪽으로만 떨어졌습니다.


증거자료 2호. 선택의 방해. 원고가 “해볼까”라고 말할 때마다 피고들은 단어를 먼저 붙였습니다. 도망. 포기. 철없음. 그 단어들이 원고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원고는 결국 시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욕은 덜 먹으니까. 다만 그 대신 인생이 줄었습니다. 줄어든 인생은 누가 돌려줍니까.


세 번째 청구 원인. 정서적 강요 및 자기혐오 유발. 원고는 지금도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병신이다. 내 인생은 내가 망쳤다. 피고들이 만든 구조를 통과한 뒤 원고에게 남은 판결문은 그거 하나였습니다. “네가 못났으니까.” 피고의 개입은 조언으로 포장됐고, 원고의 결과는 인격으로 환원됐습니다. 원고는 지금도 그 환원을 매일 반복합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벌을 받는 사람처럼.


재판장님. 원고는 묻습니다. 책임져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렇게 확신했습니까. 왜 내 인생을 네 입으로 설계했습니까. 내가 내 방식으로 망할 권리조차 없게 만들고, 그럼에도 “다 너 잘되라고”로 끝내는 게 과연 정당합니까.


원고의 청구 취지는 단순합니다. 피고들이 했던 말의 무게를 인정하라는 것. 그리고 그 말들이 낳은 결과가 오롯이 원고의 탓으로만 남지 않게 해달라는 것. 사실 원고도 알고 있습니다. 이 소송은 기각될 것입니다. 법은 이런 사건을 다루지 않습니다. 가족은 원래 그런 거라고,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그렇게 말하며 넘길 것입니다.


그래도 원고는 접수를 합니다. 접수창구에 서류를 내밀 듯이, 오늘 이 문장을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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