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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달 Sep 26. 2022

주방 철거 당일: 지새운 밤, 숙소 계약하기

2021년 10월 23일 토요일



  주방 상부 장, 하부 장 철거 당일. 오전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도착하겠다고 한 당근 유저님은 8시 20분이 조금 지난 시각에 칼 같이 도착했다. 현관에 타일 깔기와 같은 일을 함께 셀프로 했다는 남편분, 전기 기술자이신 남동생 분과 함께였다.


철거 전 날 주방 풍경

  나름대로 정들었던 주방과 작별(?)하는 날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냉장고 장과 흰색 상부 장, 고동색 하부 장을 모두 철거한다. 당근 유저님은 해당 장들을 가지고 가서 새로 짓는 당신의 댁에 직접 설치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당근 유저님 일행은 작업에 신속하게 착수하여 부지런한 시간을 직조했다.


냉장고장 철거 완료. 싱크대 있는 하부 장 철거 중 풍경.


  여담 같지만 여담 아닌,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덧붙인다. 나는 간밤에 2시간 남짓 잤다. 아기가 잠든 뒤 새벽 3시 반까지는 기존 드레스룸의 옷장에 있던 옷들을 엊그제 설치한 안방 붙박이장으로 몽땅 옮겼다. 3시 반부터 5시 반 즈음까지는 비몽사몽 상태로 주방 살림들을 기존 드레스룸의 선반에 옮겼다. 5시 반에 내가 쓰러지듯 침대에 눕자 남편이 일어나서 옷과 주방 살림 이사를 마무리했다.

옷은 붙박이장으로 가고, 옷방으로 이사 온 주방 살림


  보관이사를 했다면 거치지 않았을 과정이다. 살면서 공사를 한다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수작업과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주방 철거가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거실 책장에서 장난감과 책 가지 몇 개를 집어 들고 딸과 안방으로 들어갔다. 놀다가 이따금 지이이잉~하는 드릴 소리가 들리면 아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응, 하연아~ 저건 드릴 소리야. 우리 집 주방에 새 장이 들어오려고 이전에 쓰던 장들 안녕하는 중이야.라고 말해줬다.


  신랑은 철거가 진행 중인 주방과 안방을 오갔다. 철거한 장을 옮길 때 힘을 보태기도 하고, 아기와 놀아주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부모이자 집주인이자 철거 작업자이자 인테리어 업자였다.


  상부 장은 10센티미터도 더 되어 보이는 굵고 긴 못으로 콘크리트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하부 장 역시 벽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부실 공사로 논란이 많은 브랜드라고 한다. 그런데 당근 유저님 일행은 철거하면서 ‘어쩌면 설치가 이렇게 꼼꼼하게 되어 있냐’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렇다. 나도 이 집에 살면서 딱히 이렇다 할 하자를 발견한 적은 없다. 뽑기를 잘 한 건지. 일반적인 생각은 편견일 때도 있는 법이다.


  작업이 시작된 지 2~3시간 남짓 지난 11시경. 12개월 딸에게 젖을 먹이면서 ‘모두들 점심을 먹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배달의 민족 어플을 켰다. 냉장고 붙박이 장과 상부 장이 얼추 철거된 상태였다. 나는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이제 진짜 되돌릴 수 없구나 긴장되기도 하고, 이왕 뜯기 시작한 거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하부 장 분배기 근처의 전기들이 전혀 망가지지 않도록 철거가 진행됐다. 정말 대단한 분들을 만났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4시 무렵. 드디어 철거가 끝났다. 당근 유저님 일행이 철거한 가구들을 전용 트럭에 싣고 떠나자 내 몸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긴장이 풀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이 되었다. 철거 후의 주방을 보니 여러 생각이 마음에 스쳤다. 빈 공간이 도화지처럼 보여서 채워 나갈 의욕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내가 이 휑한 공간을 제대로 채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나는 두려움을 직시하며 스스로를 토닥였다.


  저녁 5시 무렵. 신랑과 아기가 집을 지키고 나는 신호등 5개쯤 거쳐 나오는 동네 부동산에 찾아갔다. 어제 봤던 방을 계약하기 위해서다. 다락이 있는 원룸으로 2주일 동안 빌리는 데 50만 원, 복비(소개비) 10만 원이었다. 바닥이 끈적거리고, 주방에는 후드가 없고 수전에서는 물이 새기도 하는 낡은 외양에 비하면 비싼 값이다. 하지만 ‘숙소 없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나는 철거 후의 주방을 보자마자 일단 밥을 해 먹을 임시 주방으로서라도 그 집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모레 월요일에는 이케아 주방 플래너가 실측 플래닝을 하러 온다. 12만 원을 내고 실측 플래닝 서비스를 받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구조로 주방을 다시 계획했기 때문에 7만 원을 더 내고 추가 플래닝을 받는다. 아마도 좀 더 실질적이고 꼼꼼한 플래닝이 될 것이다. (최초 실측 플래닝 비용 12만 원은 이케아 가구 설치 완료 후에 이케아 포인트로 환급받았다. 추가 플래닝 비용 7만 원은 환급해주지 않음.)


  내일은 주방 식기류 중 일부를 계약한 숙소로 옮기고, 위 사진 속 타일을 뜯어내야 한다. 신랑이 딸을 안고 각을 재고 있다. 두려움을 직시하여 그간 해온 준비를 더욱 꼼꼼히 하되, 설레는 마음을 또한 놓지 말아야 이 여정을 즐겁게 끝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기 전 주방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되뇌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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