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에 남겨진 별표와 지워진 시간

나답게 머무는 순간들의 기억

by oui

처음의 여행은 늘 설렘을 품고 시작된다.


그저 일상의 궤도에서 잠시 빠져나오고 싶다는 바람.

평소와는 다른 공기 속에서 나를 다시 세우고 싶다는 기대들.


여행은 가방을 꾸리기도 전,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부터 저마다의 얼굴을 드러낸다.


어떤 이는 촘촘한 일정표를 채우며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설렘을 느끼고, 어떤 이는 조금 느슨한 계획표를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사실 여행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알찬 경험을 통해 에너지를 채우는 탐험가의 마음도,

일상의 짐을 내려놓고 쉼을 선택하는 여행자의 마음도 모두 귀한 선택이다.


다만, 최고의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는 성실한 마음이 어느새 나를 증명해야 하는 ‘성과’로 변질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행이 기쁨이 아니라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잠시 멈춰야 한다. 내가 진짜 원해서 걷는 길인지, 아니면 남들만큼 누리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서두르는 것인지 가늠해 볼 여백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현실은 늘 계획보다 한 박자 느리거나 빠르기 일쑤다.

버스는 늦고, 식당 앞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으며, 날씨는 예보를 비껴간다.


이때 예상치 못한 상황을 여행의 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것을 '실패'나 '낭비'로 느끼는 순간 마음의 여유는 사라진다. 그렇게 해치워야 할 과제가 된 여행은, 어쩌면 우리가 도망쳐온 그 빽빽한 삶의 연장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했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라고.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으려 조급해하느라, 정작 그 풍경을 마주한 내 안의 시선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촘촘한 일정이 내 삶의 속도와 기분 좋게 맞닿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방식이 나의 속도보다 앞서 나가는 여행을 억지로 뒤따라가는 일이었다면, 그 화각 안에 담긴 풍경은 온전한 내 것이 되기 어렵다.


몇 번의 여행을 거치며 깨닫는다.


여행의 온도는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떤 상태로 그 자리에 머무느냐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을.


철저한 계획이 주는 성취감만큼이나, 계획이 어긋난 자리에서 마주하는 우연한 골목도 소중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을 가졌든 나만의 속도를 잃지 않는 일이다.


결국 여행의 본질은 타인의 방식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감각을 발견하는 데 있다.


누군가는 촘촘한 일정 속에서 낯선 세계를 탐험하며 생동감을 얻고, 누군가는 비어 있는 여백을 보며 비로소 안도한다.


어떤 방식이든 다녀온 뒤의 마음이 이전보다 가벼워진 상태라면, 사진 속 풍경보다 그때의 감각이 더 선명하게 남는 기억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근사한 여행이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여행은 얼마나 많은 곳에 발도장을 찍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나다운 호흡으로 그 자리에 머물렀느냐로 완성된다는 것을.


별표 가득한 지도를 따라 즐겁게 뛰어다니든, 때로는 조금 느슨하게 길을 잃어보든. 그 모든 여정이 결국 나를 덜 소모시키면서도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굳이 무언가를 쟁취하려 애쓰지 않아도, 여행의 목적지인 ‘나’에게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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