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과 여름은 유난히 이상했다.
아이들이 바다에 빠져서 구조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답답했다. 묵직한 돌이 내 몸에 가득 쌓였고, 무슨 일을 해도 눈물이 났다.
내 자식도 아닌데, 내 동생도 아닌데... 그렇게 한이 서릴 수 있나 싶었다.
나도 고등학교 때 제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갈 때 배를 타고 올 때 비행기를 탔더랬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하면 배가 침몰했다고 300여 명의 사람을 구조하지 못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슬픔에서 겨우 헤엄쳐나올 무렵이었던 7월.
여름인데도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이 나고 갑자기 모든 냄새가 싫어졌다.
집에서 파주까지 출퇴근이 너무 고되서 출판단지 내에 있는 원룸텔에서 지낸 지 보름만이었다.
공용화장실, 공용 주방 냄새가 싫어서 헛구역질이 나왔고
병든 닭마냥 졸았더랬다.
혹시나 싶어 임신테스트기를 했더니 두 줄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또 다시 가라앉았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내가 엄마라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애아빠가 된 당시 남자친구와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깊이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당시 내 나이가 서른이었고, 결혼을 도피처로 삼고 싶을 만큼 밥벌이가 지겨운 연차기도 했고,
서른이 넘어서 결혼을 못하면 왠지 이대로 영영 결혼을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갖고 있긴 했다.
더구나 평소 자궁이 좋지 않아 생리일도 불규칙했던 나에게 찾아온 아이라니,
두렵고 떨리지만 일단은 무조건 낳고 싶었다. 낳아야 했다.
배에 탔던 많은 아이들이 사라져간 걸 지켜 봤는데
내 손으로 나에게 찾아온 아이의 생명을 차마 앗아갈 수 없었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신했다는 게 부끄럽긴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이 인간을 낳아 키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니 나도 할 수 있겠지?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정말 일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던 사람이었구나...
아무튼 아이를 낳아야 하니 아이 아빠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임신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 남자친구도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자고 했다.
물론 한편에는 예정에 없던 급격한 삶의 변화가 내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몰라 몹시 두렵고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일하면 대리로 승진할 수 있는데,
애아빠가 될 사람 거처가 파주와는 출퇴근하기 힘든 지방이라 그곳에서 결혼생활을 하긴 힘들텐데
어떡하지... 하는 현실적인 고민들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이를 낳기 전, 식도 올리고 혼인신고도 해야 하니
양가에 임신 사실&결혼 의사를 동시에 밝히기로 했는데
임신과 결혼을 반가워했던 우리 엄마와 달리 애아빠의 어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 되실 분은
상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