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경단녀의 밥벌이 이야기 23

by 시작

<어쩔 수가 없다>는 25년 경력의 펄프맨, 오랜 시간 몸담은 제지회사에서 짤린 가장의 이야기다 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지만 난 이 영화를 꽤 인상깊게 봤다 작품성과 박찬욱이 담으려 했던 메시지를 떠나서 '일'의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하며 감상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일' '직업' '업' 업의 부수는 나무 목이다

그 옛날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은 모든 일의 근간이었다

뗄감이 있어야 불을 떼서 밥을 먹을 수 있고 방을 데필 수 있었다 나무 없이, 나무를 베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일이란 그런 거다 자의든 타의든 하지 않곤 살 수 없다 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도 미쳐 죽기도 한다

주인공은 오랜 시간 분재를 가꾸며 일에 적응했다 분재란 인위적으로 묶고 꺾어 아름다워 보이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인위적일지라도 그 아름다움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지로 묶고 억지로 길들인다


이력서를 쓸 데마다 내가 했던 업을 복기한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고민할 새 없이 10년을 출판 일을 했다

주인공은 종이를 만질 때 포근하다고 했는데 난 그런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기 위해, 과정이 인위적일지라도 결과에만 집중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을 때 희열도 잠시 또 그 몰입의 시간에 빠지기 위해 깊은 성찰도 반성도 없이 그 과정을 반복했다 중독처럼


그렇게 중독된 일을,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살 수 있을까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정 기술이 필요한 일들이 있다 그 업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들. 1~2년 했으면 모를까 그런 일을 10~20년했다면...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일들을 억지로 다시 해야겠지만, 이미 한 업계에서 10년 이상 그 일만을 해왔다면 다른 일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다 나라는 자아가 이미 분재처럼 그 일의 형태에 맞춰 자랐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영화처럼 일이 잘렸다고, 그 업계에 다시 취업하겠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다른 일을 알아보지 않고 왜 다시 그 업으로 돌아가야만 했는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헌데 이젠 그렇게 어렵게 재취업에 성공하더라도 AI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언젠가 나도 AI에 대체되겠지만 일단은 다시 일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영화는 말미에 기계에 의해 무참히 잘려나가는 나무들을 보여 준다 AI에 대체되어 잘려나가는 인간들과 나무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업을 이어가려고 애써도 결국 인간은 AI를 뛰어넘을 수 없다 내가 요즘 제2의 직업을 고민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어쩔수없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