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질 삶을 담을 새로운 프레임
딱히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부터인가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자꾸 눈에 띄었다. 몸이 전과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삶에서의 내 존재가치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나이를 먹어가다 종국에는 도달하고 마는 지점에 대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지극히 멀어지고 싶고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은 욕구도 함께 느낀다. 죽음이 연상시키는 '노화'가 가져오는 일상의 불온전함들,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분의 일상을 삶에서 만날 때마다 그 나이가 되었을 때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며 서글퍼진다. 채널을 돌리다 관련된 소재의 드라마나 영화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면서도 애써 빠르게 지나쳐 버리게 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었다. '죽음' 그리고 '노화' 유사한 범주인 듯 하지만 다른 것이다. 노화의 끝에 죽음이 있는 것은 맞지만 죽음의 앞에 반드시 노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 내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떤 심적인 동요를 느끼게 될지는 추측할 수 있지만 정작 내가 느끼게 될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없다. 그건 그 누구도 답을 해주기 힘든 범주의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 이후에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기를 바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죽음 그 이후에도 무언가는 지속적으로 남아서 살아있을 때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에 머무르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라는 방향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그저 '어느 쪽을 믿는 것이 내 마음을 더 편하게 해 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한 방향일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는. 그 자체는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없다.
오히려 죽음은 현재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주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메멘토 모리,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유효한 것이다. 나바호족에게서 "메멘토 모리"는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살아온 날들에 충분히 만족하여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이 '정말 잘 놀다 간다'며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현재에서 하고자 하는 것들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말고 시도해 보아야겠다는 의지를 주는 것도 죽음이라는 삶의 유한성이 주는 선물일 것이다.
다만 그것이 슬프거나 두려운 이유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이다. 평범한 어느 날의 작은 에피소드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그 순간 함께 하고 있는 사람과 언젠가 이별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깃들어서다. 너무 당연하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나의 부재로 인한 것이든 타인의 부재로 인한 것이든 그렇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정말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이 없었으면 평생 절감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들. 그러니 때때로 죽음은 감사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삶에서 더없이 깊은 깨달음을 주는 스승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노화, 이것은 삶의 가치를 더하는 깨달음을 주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방경이 줄어들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에 제약이 많아질 때 느끼는 상실감과 무력감, 그것은 노화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불러들이는 현실들이다. 지나치다 문득 마주치게 되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부쩍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느리고 부자연스럽고 무기력해 보이는 몸의 움직임이 내 것이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 때문이다. 아직은 내가 직면하게 될 포기라는 것의 윤곽도 와 닿지 않는다.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막막함은 가중되는 것 같다. 곧 잃을 텐데 뭘 잃을지 몰라서.
어쩌면 노화란 자신의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려는 투쟁의 과정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습관처럼 해 오던 것들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하기를 바라는 것 그것 하나.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뉘는 일이 올 것이다. 할 수 없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은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타인의 손을 빌린다는 것은 내 삶의 자유도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대게는 신체적인 제약 여부가 그 선을 가르는 핵심이 되는 것 같다. 마치 일정 시간 이후에는 태엽이 천천히 감겨 느리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는 듯하다. 서서히 느려지고 서서히 삐걱대면서 서서히 늙어감에 길들여지는 것. 갑작스럽게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면 큰 절망감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조금씩 맛을 보이며 조금씩 내려놓게 만드는 것. 신이 있다면 이 또한 인간을 위한 배려일까?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늘어나고 노화를 이기기 위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중년에 이르러 전에 없던 생각들이 많아지는 건 기술의 진보에 따라 노화의 과정이 더 무디어지면서 길어질지 모른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길어진 노화의 연장선에서 삶에 대한 만족도를 잃지 않기 위해 서서히 준비해 가야 하는 것이 있다. 일이라는 것의 의미, 관계라는 것의 의미, 가치관이라는 것의 의미, 감정이라는 것의 의미 등 이전에 가졌던 생각들의 틀을 바꾸는 것 말이다. 상실감과 무력감은 달라진 삶을 바라 볼 나만의 새로운 프레임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채 이전의 틀대로만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서서히 느려지고 서서히 삐걱대도록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신의 배려라면,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달라질 삶을 담을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자신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은 우리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