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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Nov 20. 2020

불행한 자의 통찰력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중에서


불행한 이가 일단 통찰력을 가지면
더욱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기만하거나 물러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에밀 시오랑>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니 나란 사람은 '제대로 규정된 개체성'을 지니지 못한 탓에 대체 가능한 존재일 뿐이고, 나의 자아를 재창조하고자 노력하지 못한 까닭에 내면을 들여다본 변변한 작품 하나 남길 수 없는 형편이라 안쓰러우며, "세계가 왜 이모양인가" 싶은 의문을 가지는 것을 보니 삶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나의 존재에 어떤 목적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려 애쓰는 것을 보니 심약한 투사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런 나의 자아 자체가 결국 빈 공간 속의 원자 덩어리에 불과함은 물론이거니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자들이 모여사는 이 세계 조차도 본질은 규칙이 없는 카오스 상태라니. 위의 말에 동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통찰력을 포기할 것인가. 

기만하거나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더 불행할 것도 없다. 

진정한 불행이란 그 꿀꿀한 감정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철학교사이자 작가라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그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원 없이 철학의 이모저모를 자신의 의지대로 뜯어보고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 매우 부럽다는 것이다. 자신을 '염세주의자'라고 칭할 수 있는 건 저자만의 확고한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를 명명할 수 있게 된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책의 소제목처럼 이 사람,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사상가들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구나 싶기도 하다. 


나는 어떤가. 

여전히 대체 가능한 노예가 말한다. 

염세주의자라도 될 걸 그랬어! 




프리드리히 니체 :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저마다 어느 한 종에 속해 있고 언제나 똑같은 특징적 활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제대로 규정된 개체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체 가능한 존재들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 관념은 슬픔의 대용품이다.
"바로 이 자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자아를 재창조하고자 노력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작품도 없다. (중략) 쇼펜하우어는 좌석에 앉아 무대 위 주인공의 불운을 지켜보는 비극 애호가가 어떻게 최악의 재앙에서 '기쁨의 계시'를 감지하는지 강조한다. 그러한 비극 애호가는 한 인간의 불행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불행의 표상을 인간 조건 자체로서 즐기는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인생의 이야기는 항상 고통의 이야기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삶의 비참과 고통은 철학적 성찰에 대한 충동을 가장 강력하게 불러일으킨다. 만약 우리 삶이 고통 없이 흘러가고 어떤 의미마저 거기 있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세계가 왜 존재하며 왜 이 모양인지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당연시될 테니까." (중략)  만약 범속한 인간이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안목의 결여로 인해 가식조차 없이 뻔뻔하게 미(美)를 멸시하는 소리를 떠든다면, 이는 그에게 아무런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재능은 생의 의지의 선천적 혹은 우발적 결핍을 전제한다.

전도서 :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아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 하는가?
한 사물이 어떤 목적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의 의향을 자연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인간들이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착각은 더 심해진다. 

미셸드 몽테뉴 : 우리 생애의 목적은 죽음이다.
몽테규는 세계에 본질이 없듯 자기 안에도 자아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세계가 무한한 물체들의 우연한 결합에 지나지 않듯, 그의 자아라는 것 또한 빈 공간 속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기뻐하거나 괴로워하는 원자들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클레망 로세 : '난잡한' 상태가 만물의 근본 상태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정작 무너진 것은 세계도 아니요, 세계에 속한 그 무엇도 아니다. 무너진 것은 '우주적'환상이다. 우리는 그 환상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생각해왔을 뿐이다. (중략) 그런데 상실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잔인한 진실을 드러낸다. 인간의 목숨이 우연과 죽음, 말하자면 '카오스'에 내맡겨진 여러 가지 것들 중 하나 일 뿐이라는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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