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얄리 Jan 19. 2021

신의 미스터리 변주곡 1번

<지옥> 신의 영역 이탈인가, 인간의 착각 직시인가.

  어느 날 신의 심판이 현실 세계에서 시연되는 일이 벌어진다. 신의 현존이다. 인간에게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매우 실존적인 이유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죗값을 치르지 않고 살아가는 타인들을 바라보며 울분을 삼켜야 했던 이들에게는 정말 반가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을까? 결론을 얘기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신이 공평하리라는 건,
인간의 착각일 뿐이다.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신은 공평하지도, 원칙이 명확하지도 않다. 그 사실이 “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어째서 선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사람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갈 수가 있는 거지?”라는 물음에 “신은 있다.”라는 답을 역설적으로 내놓게 한다. 신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인간이 원했던 신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신’이라는 배우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캐릭터를 뚫고 나온 본체는 더 이상 메카폰을 집어 든 인간의 말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에 의해 예측할 수 없음이 신의 본질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신의 변주를 허용할 수 없다. 신이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인간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일이란 일어날 수 없다. 납득되지 않는 신이란 존재할 이유가 없는 신이고, 신의 계시에 힘입어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승화시키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 위협적인 대상이 된다. 그러니 반드시 이유가 있는 죽음이어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이유’를 유추하고 조작할 수밖에 없다. 


신의 현존인가
인간의 지옥존인가


  과연 그들은 신이었을까? 그 신이 인간 세계로 불시에 찾아들어 심판을 하는 것일까? 인간이 심판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신에게는 장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 현실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곳이 신들의 놀이터인가? 인간이 그들의 세계로 굴러 떨어져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인가? 오직 죽음의 공포를 다스리기 위해 있지도 않은 룰을 애써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얻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미스터리 해져 버렸다. 그들의 변주로 인하여...... 


  확실한 건, 현실과 지옥의 경계가 분명했던 때는 이제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경계를 뛰어넘어 현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지옥은 현실과 융합되어 더 이상 구분 지어지지 않는다. 신,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 동안에도 현실은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지옥이 현실 위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에 의해, 신들의 미스터리 한 변주는 무자비한 공포로 재해석되고 이용된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문득 궁금해진다. 


천국이 현존하게 되면 
달랐을까?


  인간의 왜곡을 피해 갈 수 있었을까?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 심판이 존재했다면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은 구원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신의 심판이 현실에서 시연되듯이 신의 구원 역시 현실에서 시연된다면, 그 안에 아무런 규칙이 없다면. 이 또한 현실과 융합되어 무감각한 몽환으로 재해석되고 이용될 것이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불행한 자의 통찰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