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과 <불을 지피다>
문명에 길들여진 일상에서 벗어나 극한의 환경에 처했을 때, 벅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기 안의 본성을 느낀다. 그의 귀는 듣지 못하던 것을 듣고, 그의 눈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며, 그의 코는 맡지 못했던 냄새를 맡는다. 무엇보다 그는 느껴본 적 없는 '살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을 느낀다.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굴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충분히 야비해지며 살아남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한다.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삶, 그것과 마주했을 때 그에게 야성에 대한 이끌림이 찾아온다.
이 책은 '야성의 부름'이라는 것과 '불을 지피다'라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을 지피다는 부록이고 야성의 부름과는 별개의 단편이다.) 그건 각각의 이야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극한의 상황에서 동물 그리고 인간의 참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각각의 주인공의 최후는 상반된다. 하지만 결론은 같다. 묘하게도...
야성의 부름
주인공은 개다. 개치고는 상팔자라 불릴만한 문명의 세계에서 꽤나 편하게 지내던, 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겪어 본 적 없는 추위와 지독한 폭력 앞에 가차 없이 굴복하던 날부터 변해간다. 부와 명예 따위를 애초에 바라던 종속은 아닐지라도 맹목적인 살생을 하는 삶이란 없었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썰매개의 무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워 우두머리가 되었다가, 매일 반복되는 끝없는 질주의 채바퀴를 돌았다가,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 동반자살이나 다름없을 위험을 거부하기 위해 죽을 만큼 사투를 벌였다가, 생에 더없이 사랑하는 벗과 같은 사람을 만났다가, 어찌할 수 없는 야성을 이기지 못하고 문명의 끝자락마저도 벗어던지고 마는 동안 벅은 변하고 또 변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강해졌다. 그리고 결국엔 살아남았다.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켰던 인간이 실상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인간과 함께 지내며 습득한 문명의 삶을 과감하게 버렸다. 야성은 문명보다 강했다.
불을 지피다
주인공은 사람이다. 영하 50도가 넘는 혹독한 추위 속에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캠프까지 한 마리의 개를 데리고 썰매도 없이 혼자 걸어간다. 그의 머릿속에는 곧 먹을 점심과 그보다 더 든든할 저녁식사에 대한 생각뿐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위험을 과소평가했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가졌다. 하여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자포자기하는 순간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다. 그는 문명에서 터득한대로 '불만 지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불발되면서 그의 생명도 끝이 났다. 문명은 야성보다 약했다.
상상력의 유무
개는 상상력이 있어 자신을 물어 죽일 수 있는 적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싸워 생명을 사수하는 것과 무리들 사이의 우위를 점하는 두 가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사람은 상상력이 없어 자신의 몸이 차디차게 굳어가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불을 피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사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채 동사했다. 문제는 '그 상상력이 어디로부터 생겨나는가'이다. 그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으로부터 온다. 문명의 이점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극한의 상황에서는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야성을 일깨워 감각 이상의 감각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상상력이다. 흔히 상상력을 생존과 무관하게 생각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할 때에는 가장 절실한 것이 그것이다.
야성과 문명
대부분의 인간은 야성과 마주쳐야 할 일이 없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각종 위험한 것으로부터의 자기 방어 등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힘으로 무장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어느 순간 문명이 지구 상의 많은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여기고 인간이 가장 강한 종족이라는 맹신에 빠진다. 하지만 정말 강한 것이란 '그 어떤 무장도 없는 맨몸일 때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있는가'이다. 아주 오래전 인간이 수렵에 의해 생존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때에 비해 더 약해지고 있는지 모른다. 문명은 맨몸으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야성을 휘발시킨다. 그리고 끝내 야성의 필요성마저도 휘발시킨다. 문명에 길들여져 야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부름의 소리
냄비 안에 물이 서서히 데워지는 온기에 취해 자신이 그 안에서 익어가는 줄도 모르는 개구리 이야기, 때때로 자신의 삶이 그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뭔가 기존의 것과 달라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이나 해 본 적이 없는 것을 하기 위해 긴장해야 하는 상황과 같은 것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려고 하는, 알고 있던 대로 살고 편안함을 위해 '이것이 사라지면 어쩌나'하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자신의 자리에 눌러앉아 있으려고 하는, 그런 자신을 느낄 때면 말이다. 그럴 때면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곤 한다. '일어나, 움직여, 생각을 해'와 같은 일종의 변화를 독려하는 목소리. 벅에게 들려오던 야성의 부름은 벅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본성의 부름이다. 우리에게도 그 부름은 분명히 있다. 그러니 선택해야 한다. 그 부름에 응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외면할 것인지. 굳어가는 손으로 계속 불을 지피려 애를 쓰던 누구처럼 추위 속에 동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죽음이 안일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는 법은 없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장면 1)
벅이 썰매개로 쓰이기 위해 잔인하게 굴복당하던 장면, 노련한 곤봉 조련에 의해 벅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본능적으로 저항을 멈췄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동물은 이미 진 싸움임에도 무모하게 죽을 때까지 덤벼들지 않는다. '진다'라는 것보다 '죽는다'라는 것이 더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안다. 무모하게 덤비는 게 용기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장면 2)
벅이 자신의 야성을 시험해보리라 결심이라도 한 듯이 사슴 무리 중 우두머리인 거대한 수사슴을 사냥한다. 그는 무리로부터 그 수사슴을 떼어놓고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충족시킬 기회를 빼앗는데 주력한다. 끈질긴 그의 행위는 결국 무리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자연스럽게 내어주는 것과 수사슴 자신이 생의 사수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수사슴을 사냥하여 굴복시킨 벅은 비로소 자신 안의 야성을 체득하고 만다. 벅이 야성의 부름을 듣게 된 것은 스스로의 야성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장면 3)
벅이 마주친 여러 주인들 중 가장 어리석과 이기적이었던 사람들, 생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들이 무리하게 살얼음이 덮인 강을 향해 썰매개들을 앞장 세울 때 벅은 죽을 만큼 얻어맞으면서도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버틴다. 결국 어리석은 그의 주인은 다른 개들을 앞세워 강으로 돌진하고 결국 얼음이 깨져 모두 물에 빠져 죽음에 이르고 만다. 오직 벅만이 그 위험을 감지한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 버텼고 생존했다. 다른 개들이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벅처럼 죽을 각오로 죽음을 필사적으로 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생존이란 단순하지 않다.
그렇기에 더더욱 본능에 예민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거저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
그럼에도
생존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무디고 무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