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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n 10. 2021

ㄱ (기억) 하니?

라고 묻다.

그때 기억나?


  요즘 들어 내 주변이 내게 건네는 메시지의 공통점은 '기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날의 추억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고,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만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부실한 존재감에 대한 애착 내지는 미련이다. '기억'이라고 불리는 순간 현재의 것과는 확연하게 분리되는, 마치 힘없이 들고 있던 물건이 지나가던 사람과의 가벼운 마찰로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처럼 나로부터 멀어지는 듯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쥐고 있었던 물건의 존재를 느낀다. '내 것이었구나'한다.


그럼 기억하지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앞으로의 시간들을 상상하기보다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것이 많아졌다.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특정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일상의 곳곳에서 나를 낚아챈다.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의 얼굴에서 세월이 느껴질 때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이 되면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젊은 얼굴 하나가 연기처럼 흩어져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낀다. 늦은 저녁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멜로디는 그것과 연결된 과거의 거리 한가운데 나를 데려다 놓고 나를 설레게 하거나 아프게 하거나 가슴 뛰게 하거나 화를 내게 했던 일들의 찬라들 속에서 요동치게 한다. 그러니 기억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득해져 가. 기억도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점점 더 작아지는 나라는 사람, 때때로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걷고 있다가도 문득 사람들만 보이고 내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소멸감이 들 때가 있다.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떨며 걸어오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나였다가, 데이트를 하려는 것인지 한껏 멋을 내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나였다가, 퉁퉁하게 나이 살이 찐 화장기 없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나였다가, 한발 한발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내디디며 걷는 어르신의 모습이 나였다 한다. 이렇게 동작이 줄고 말이 줄고 나의 존재마저도 줄어가는 것일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이 나였다가 일순간 모두 내가 아니게 되는. 정말이지 이대로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나와 별개로 이어질 것만 같다. 그렇게 아득해져 가지 않는다면 굳이 기억을 물을 필요가 있었을까. 늘 있는 것들은 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테니. 


풍경은 함께 바라본 기억을 담는 그릇



기억해줘, 기억할게


  '기억'을 묻는 것은 '존재'를 묻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날의 시간을 묻는 것은 지난날의 시간을 고스란히 안고 현재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묻는 것이다. 내게 있는 폐쇄된 기억은 힘이 없지만 나에게 있는 타인에 대한 기억과 타인에게 있는 나에 대한 기억을 묻고 답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유의미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 까닭에 "기억하니?"라는 말을 때때로 "기억해줘"라는 당부이거나 "기억할게"라는 다짐으로 들린다. 혹은 "거기 있어줘"이거나 "여기 있을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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