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시선, 로마의 휴일

'엄마'라는 역할보다는 그들 자신이 되어 마음껏 누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by 보라진

시차 때문인지, 낯선 곳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우리는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식탁에 모여 커피와 함께 수다를 시작했다. 날이 밝기 시작하니, 로마에 온 것이 서서히 실감 났다. 설렘과 기대감으로 우리는 다가올 오늘을 이야기하며, 어제는 어두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창밖으로 널린 빨래들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상상하던 세련되고 화려한 로마와는 달리, 낡고 정겨운 모습에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은 곳은 1층에 식당이 있고, 위층에는 주택으로 구성된 주상복합과 같은 형태였다. 복도식으로 문들이 나열되었고 가운데는 뚫려있어, 화초들을 키우거나, 도르래에 연결된 빨랫줄을 연결해 빨래를 건조하고 있었다. 오래된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는 건물 사이에 널려있는 빨래를 보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IMG_2398.jpg 우리가 묵었던 숙소의 외관


IMG_2417.jpg 그들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널려있는 옷들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로부터 숙소 앞에 매일 아침 작은 장이 선다고 들었다. 슬슬 배가 고프던 우리는 간단한 아침거리를 찾아 집 밖으로 나섰다. 멋스러운 건물들 사이에 있는 작은 광장에 장이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고 소소함으로, 파란 하늘에 햇살이 더해진 장터는 사람의 온기로 가득한 듯했다. 분명 낯선 곳인데도 정겨움이 일렁였다. 신선한 과일가게와 채소 가게에 더불어 다양한 치즈가 가득한 가게와 정육점까지, 둘러 보기 전부터 신이 났다.


IMG_2406.jpg 소소하지만 분주한 작은 마켓



엄마들 또한 봄바람이 분 듯, 설렘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빛나는 눈빛과 함께, 본능적으로 맛이 좋은 과일과 싱싱한 채소를 능숙하게 골라냈다. 엄마들의 내공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엄마들은 각자 고른 과일과 채소를 계산하면서 수줍은 목소리로 'Grazie, 그라찌에'(감사합니다) 라는 어색한 이탈리아어도 잊지 않았다. 항상 강인하게만 느껴졌던 엄마들에게 이런 소녀 같은 모습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상인들의 친근함과 여유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 같았다. 두 손 가득 빛깔 좋은 복숭아와 토마토, 싱싱한 채소들, 그리고 빵 한 덩이를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장에서 갓 사 온 과일들을 베어 무는데, 얼마나 맛이 좋던지. 우리는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슬슬 나설 채비를 했다.



IMG_2405.jpg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는 엄마들





로마 시내를 걸으며 주요 유적지를 둘러보는 일. 오늘 할 일의 전부였다. 우리의 숙소는 로마 시내에서 걸음으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엄마들은 걷고,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일이 할 일의 전부인 사실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 기쁨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했다. 그런 엄마들을 보며, '항상 '엄마'라는 역할로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신경 쓰느라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엄마'라는 역할보다는 그들 자신이 되어 마음껏 누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서로의 관계에 대한 걱정은 엄마들의 다정한 뒷모습을 보며 서서히 사라져갔다.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여행객들,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과 이곳에 사는 현지 사람들. 그리고 우리처럼 로마의 첫날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 다양하고 많은 사람이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도시 로마. 울퉁불퉁한 돌이 박혀있는 길을 걸으며, 목적지가 어디든 정처없이 이곳을 걷고 있는 자체가 꿈처럼 느껴졌다. 이 소중한 순간을,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 담았다.




IMG_2440.jpg 로마를 거니는 엄마들의 뒷모습





로마 도시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교과서에서만 보던 로마의 유명한 유적들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굴된 그 자체로 과거 도시의 흔적이 드러난 모습, 아직도 곳곳에서 발굴 중인 현장을 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을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도로 아래 또 다른 과거의 삶의 흔적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며, 현재는 다가올 미래에 어떤 역사로 기억될지, 어떠한 흔적이 남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머나먼 과거의 로마 제국 시절, 당시의 사람들이 이 도시에 거니는 상상을 해 보기도 하며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이 도시를 거닐었다.




IMG_2473-1.jpg 관광객으로 가득 했던 트레비 분수.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장관을 보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많은 사람이 지금 이 감격을 담기 위해 손바닥만 한 네모난 화면을 꺼내 들고 있었다.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셔터를 누르느라 바쁜 듯이, 나 또한 엄마들을 위해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이 많은 사람에게 이곳은 다 각자의 경험에 의해 다른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훗날 우리는 이 사진을 통해 이곳은 우리에게 어떠한 기억으로 남게 될지,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풍경과 화면에 담긴 풍경은 그 깊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또 언제 오게 될지 모르는 이곳의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며, 머리와 마음에 담기 위해 바라보고, 바라보았다.




IMG_2556.jpg 밖에서 본 포로로마노의 내부



IMG_2457.jpg 훗날 우리의 마음엔 어떠한 기억으로 남게 될까?





엄마들은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걷고 걸어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배가 고플 무렵, 우리는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를 한 조각씩 먹었다. 판판한 밀가루 반죽에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 이거면 충분했다. 별거 올라가 있지 않았는데도, 신선한 재료가 올라가 있는 피자는 그 모든 맛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여유가 넘치던 피자가게 아저씨의 모습이 그 피자의 맛을 한층 더 깊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음식의 맛은 함께하는 사람과,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손님이 많든 적든 웃는 모습으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보며, 이 도시에 점점 빠져드는 것 같았다.



IMG_2612.jpg 인상 좋은 피자가게 아저씨





로마 시내의 주요 관광지를 다 둘러본 후, 로마 시내 곳곳에 즐비한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았다. 로마를 기억할 수 있게, 거대한 콜로세움을 손바닥만 하게 만들어 놓은 자석이나 파스타를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여러 기념품이 눈에 띄었다. 엄마들은 낯선 곳을 탐험하는 소녀들처럼, 소소한 기념품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거리의 꽃집을 바라보기도 하고, 멋진 남자가 있으면 뒤에서 함께 수군수군 거리기도 했다.



IMG_2601.jpg




시내 곳곳을 종일 걸어 다니니, 언제 한국에 있었냐는 듯했다. 우리는 이곳의 날씨, 거리, 사람 등 이 도시를 둘러싼 모든 것에 금방 적응한 듯했다. 정말 발길 가는 대로 걷고 걸었다. 광장에서 마술쇼도 구경하고, 거리의 음악회도 들으며 지금, 이 순간을 만끽했다.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 낯선 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돌아다니는 하루. 엄마들은 걷고 걸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서로를 존중하고,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좋은 사이로 발전해가는 엄마들을 보며 뿌듯했다. 낯선 곳에 대한 거리낌 없이,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엄마들을 보며, 원래 이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나 싶기까지 했다.




IMG_2613.jpg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며, 살까 말까 고민한 앞치마





어느새 오후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가보고 싶었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로마를 대표하는 파스타인 '카치오 에 페페(Cacio e pepe)'를 꼭 맛보고 싶었다. 파스타에 치즈 가루, 그리고 후추를 버무리면 완성되는 파스타였다. 현지인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레스토랑인지,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파스타의 면은 우리나라의 칼국수처럼 두툼했다. 내가 생각하던 건조된 면을 삶는 것이 아닌, 생면을 삶아 파스타로 내어주는 곳이었다. 기대하던 카치오 에 페페는 내 입맛에는 조금 짭짤하긴 했지만, 고소한 치즈와 칼칼한 후추의 맛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엄마들은 이 파스타보다는, 이 레스토랑을 대표하는 파스타의 맛에 푹 빠졌다. 가지와 토마토소스가 어우러진 파스타였는데, 여태까지 먹어오던 토마토 소스 맛과는 달랐다. 구수하기도 하면서, 뭔가 감칠맛이 간간하게 느껴지는 설명할 수 없는 맛이, 계속 손이 가게 했다.




IMG_1630-1.jpg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Nannarella'라는 레스토랑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우리 셋은 녹초가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나간 오늘 하루가 꼭 꿈을 꾼 것 같았다. 아무 일 없이, 오늘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음에 감사했다. 우리 셋은 점점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걷고 걸으며 피곤했을 텐데도, 불평하나 없이 튼튼할 수 있었던 엄마들의 체력에도 감사했다.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이렇게 함께 여행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 또한 딸이나 며느리라는 딱딱한 역할보다는, 여행의 동행자로, 돈독한 관계를 쌓아 나갈 수 있는 이 시간을 더 많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즐겨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은 바티칸 일일 투어를 신청해놓은 탓에 더 일찍 집에서 나서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우리는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저녁은 남편이 도착하는 날, 서로가 익숙해진 관계는 또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기대와 함께 스르르 잠이 들었다.




IMG_2617.jpg 거리의 공연, 춤을 추는 사람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5. 엄마의 시선, 내가 명절에 여행을 간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