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닥치는, 허둥지둥하며 보낸 하루
고단했는지 낯선 곳에서도 불편함 없이 깊은 잠을 청했다. 눈을 떠보니 오전 6시. 엄마들은 언제 일어났는지 문밖에서는 시끌시끌하고 분주한 소리가 났다. 벌써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간단하게 오트밀과 커피로 아침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혼자만의 시간을 책과 커피로 시작했다. 달콤한 아침잠을 마다하고, 새벽부터 깨어있는 엄마를 보면 참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며, 그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오전 시간이 아니면, 엄마는 종일 가족들과 부대끼고, 자식들을 챙기면서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가며, 예전에는 곧잘 흘려들었던 엄마의 이야기들이 갑자기,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하나 떠오르기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침부터 재밌는 일이 있었다. 커피를 내려 마시기 위해 수돗물을 받아 포트에 물을 끓이고, 드립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어머님이 따뜻한 물을 조금 원하셔서 마지막에 있는 물을 탈탈 털어드렸다. 그런데 커피를 마실 때 목에 칼칼한 것이 걸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계속 마시는데, 어머님도 자꾸 목이 아프시다고 하셔서 포트 안을 확인해 보니, 석회 물로 때가 잔뜩 껴있던 전기 포트였던 것이다.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마신 커피를 도로 뱉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도 마셨지만, 그 석회 찌꺼기를 어머님의 컵에 탈탈 털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고 있는데, 어머님이 며느리가 이런 물을 줬다며 농담을 하시며 서로 웃으며 지나갔지만,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엄마들과 나는 최대한 포트를 열심히 닦아내고, 이제 물은 꼭 사 먹기로 다짐했다.
그런 소동이 벌어진 후, 우리는 오전 8시까지 도착해야 되는 바티칸 투어를 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된 우버가 우리의 예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그것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늦게서야 그 사실을 알고 다른 우버를 예약했다. 부지런한 엄마들 덕분에 넉넉한 시간을 두고 나와 겨우 약속 장소에 정해진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참 사소한 일들로 분주해져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약속 장소에는 투어를 위해 나온 한국 사람들이 20명 남짓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로마 시내 근교에 있다. 그 바티칸이 소장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소장품들로, 바티칸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은 로마 관광에 필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는 정도라, 보통 현지 투어 예약을 통해 관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도 여러 번 유럽여행을 다녔지만 이번이 엄마들을 위해 처음으로 현지 투어라는 것을 예약해 본 것이었다. 가이드가 관광객들에게 오디오 같은 것을 나누어주고, 이어폰을 연결해 귀에 꽂았다. 사람들을 모아 빽빽 소리 지르며 설명하는 광경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럴 필요 없이 가이드의 반경 안에만 있으면 가이드가 라디오 MC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함께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는 하진 않았지만, 함께 같은 소리를 들으며 바티칸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 재미있었다. 투어는 항상 뻔하고, 지루할 것 같다는 나의 선입견이 조금 바뀌는 순간이었다. 같은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이, 여행이라는 같은 목적하에 타지에서도 모여 각자의 설렘을 안고 같은 길을 간다는 것. 나름 매력적인 여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가 노래도 선정해서 틀어줬는데, 아침 내내 어머님에 대한 죄송함과 바티칸 투어를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과 걱정이 싹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입장부터 녹록지 않았던 바티칸이었다. 우리가 바티칸을 보고 싶은 마음이 세계 곳곳에서 로마를 여행 온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커다란 목적인 것 같았다. 모두 바티칸에 입장하기 위해 각국의 현지 투어와 함께 줄을 서 있었고, 입장시간 9시가 되자 한 그룹씩 입장을 시작했다. 그들 중 우리도 하나였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박물관의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미술 시간 교과서에서만 보던 작품들이 여기저기 걸려있었고, 거기에 가이드의 맛깔난 설명이 더해지니, 어렴풋했던 작품들이 하나둘 선명하게 다가왔다. 또한 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이런 큰 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들도 가이드의 설명이 더해지니, 더 재미있는 듯했다. 작품을 보며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눈빛이, 마치 학교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반짝거리는 눈을 가진 모범생들 같았다. 약 네 시간의 투어가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관람할 곳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였다. 바티칸 입장을 기다리며, 대략적인 천장화의 설명을 미리 들은 터라 더 기대되는 곳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이 금지되어 있어 모두가 조용하게 성당의 천장화를 감상해야 했다. 정말 컴퓨터에서, 책에서만 접하던 평평했던 천장화가 정말 높은 천장에 그려져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몇천 년이 지났음에도 느껴지는 그 생생함과 생경함. 천장 전체를 하나의 도화지로 삼아 그 높은 천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미켈란젤로의 열정이, 정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책에서 보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였다. 여러모로 바티칸 투어는 예약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은 여행을 다녀오시는 도시마다 숟가락을 모으신다. 어머님의 집에 숟가락 컬렉션이 벽면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어머님은 바티칸의 숟가락을 원하셨다. 하지만 아무 숟가락이나 허용되지는 않는다. 세계 곳곳의 숟가락을 가지고 있는 어머님이기에, 어떤 숟가락이 조금 특이하고 예쁘게 만들어졌는지 숟가락을 보는 안목이 참 좋으시다. 그리고 하나 더. 비싼 가격은 안된다. 5유로 정도가 딱 적당한 가격이다. 우리 셋은 어머님의 더 멋진 숟가락 컬렉션을 위해 바티칸에서 나와, 거의 모든 기념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숟가락을 찾았다. 정말 찾아보지 않으면 지나쳐버리기에 십상인, 숟가락들이 있었다. 같은 숟가락이어도 가격이 달랐고, 그 디자인들도 미묘하게 조금씩 달랐다. 결국, 우리는 숟가락을 보며 한참을 돌아다니며, 토의한 후 결정적으로 예쁘고 가격이 적당한 숟가락을 골라, 바티칸의 관광을 마무리했다.
이제 점심을 먹기 위해 바티칸에서 나와, 찜을 해두었던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한 15분 정도를 걸어 도착했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이 점심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었기에, 매우 당황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라, 배고플 텐데도 엄마들은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달래주었다. 더 좋은 곳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이곳저곳을 보다, 결국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바게트에 치즈와 채소 등을 얹은 부르스게타와 같은 음식이었는데, 뭔가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음식이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엄마들은 이런 가벼운 느낌이 좋다며 적당히 먹고 나와, 이탈리아에서 맛볼 수 있다는 마로치노 커피를 한 잔씩 앉아 마셨다. 코코아 가루를 우유 거품으로 녹인 후 에스프레소를 부어 만들어진 커피는 우유의 고소함과 진한 에스프레소의 커피맛이 어우러지고, 마지막엔 달콤한 맛이 특징이라고 한다. 우리 셋은 커피를 한잔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든다며, 몸 안에 피곤해 쓰러지던 감각들이 다 하나하나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숙소까지 약 3km. 우리는 걸어보기로 했다. 어제는 로마의 중심을 돌아다녔다면, 이번엔 로마 시내의 주변을 걷는 길이었다. 조금 더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며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걷기를 선택했다. 잘 걸어줄 수 엄마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내가 지도를 보며 조금 앞장을 서고, 엄마들이 뒤따라 왔다. 어릴 때, 나는 엄마가 없으면 아무 곳도 가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몇십 년이 지나 이 낯선 곳에서 내가 엄마들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니. 엄마들이 갑자기 더 어린 소녀들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 생각 없는 듯 걷는 엄마들을 뒤돌아 바라보니,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앞에 있으면 안도하고 졸졸 따라 걸었던 생각이 났다. 이렇게 길을 인도하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도 그때를 떠올렸을까?
걸어오다가 보이는 가죽 가방 가게, 신발가게, 유리로 만든 액세서리 가게 등 여러 상점을 들리며 걸어오다 보니 3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다. 우리 셋은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구경하고 구경했다. 새로운 물건들이 보이면 서로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신발 하나를 사고 싶다고 하면 같이 골라주며 쇼핑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하지만 결국 구매한 건 귀고리 하나였다. 여자들의 쇼핑이란. 참 어려운 것이다. 내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를 만난다는 것은 우연과 기적이 합쳐져야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 파스타 면과 알리오 올리오에 들어가는 마늘과 바질, 페퍼가 합쳐져 말려진 향신료를 샀다. 우리는 우선 집으로 들어가 조금 쉬고 싶었다. 마치 숙소가 이제는 우리 집이 된 것 같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그간 쇼핑에 집중이 쏠려 몰랐던 피로가 밀려왔다. 바티칸 투어부터 숙소까지, 참 많이도 걸은 하루였다. 우리는 나가서 먹을 만큼의 식욕도 사라지고, 그냥 쉬고 싶었다. 그래서 식료품 가게에서 사 온 파스타를 간단히 먹기로 했다.
나는 피곤한 엄마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뜨겁게 데운 올리브유에 그 말린 마늘과 바질과 페퍼를 잔뜩 넣으니, 그 순간 까맣게 다 타버렸다. 기름이 너무 뜨거웠던 탓이었다. 고추의 매운맛이 확 올라오며, 숙소가 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 알고 보니 미지근한 기름에 천천히 불려 가며 그 맛들이 스며들게 해야 됐던 것이다. 나는 탄 재료들을 모두 건져내고, 다시 재료를 붓고, 파스타 면을 넣어 우여곡절 끝에 오일 파스타를 완성했다. 매운맛이 확 올라와 나도 먹기 힘들었지만, 엄마들은 아침 장에서 봐온 샐러드와 함께 먹으며, 깔끔하니 느끼하지 않고 맛이 좋다고 하셨다. 종일 덤벙대며, 순탄치 않은 하루였다. 그래도 함께해주는 엄마들이 있어, 부족한 시간도 인내로 감싸 안아 주어 나 또한 그 안에서 자신감을 얻어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남편님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미리 렌트한 차로 숙소 근처에 예약해놓은 주차장에 주차하고 숙소로 왔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 렌트를 하면 ZTL(Zona traffico limitato)이라는, 시내 중심에 관광을 위한 렌터카의 통제가 제한되는 구역이 있다. 이 구역에 들어가게 되면, 엄청난 벌금이 붙는다. 이 사실을 미리 숙지한 우리는 ZTL구역을 피해 숙소에서 약 1km가량 떨어진 주차장을 예약했다. 숙소에 도착한 남편은 일을 마치고 바로 출국한 터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에어비앤비에 숙소를 잡고 방을 나눠 쓰는 것이 걱정되었다. 대부분 방이 두 개 있었고, 거실에 소파베드 하나로 총 3개의 침대가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 이야기했던 게, 남편이 거실에서 자고 나와 엄마가 한방을 쓰고 어머님에게 작은 방을 드리자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막상 남편이 도착하니, 우리 엄마는 불편하다며 나와 남편에게 큰방을 주었고, 거실 소파베드에서 주무신다고 하셨다.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결혼한 사이라지만, 두 엄마 사이에서 한방을 쓴다는 것이 나도 불편한 일이었다. 거기다 가장 좋은 안방을 차지해야 한다니…. 엄마들은 그것이 가장 편하다고 하셨다.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눈치가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각자의 공간을 갖고 싶었던 것일까. 아리송했다. 어찌했든,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방을 나누는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