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런던에 있습니다.

by 마리나

2008년, 나는 런던에 있었다. 풋풋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는데 금방 또 오겠지하던 이 곳은 생각보다 먼 나라였나보다. 마치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그리워하다 15여년이 흐른 지금 드디어 영국 땅을 밟게 되었다. 아이 둘과 함께!


다행히 큰 아이가 한국 나이로 9살이라 제 몫은 하는 편이고, 비행기에서 숙면을 취해준 여섯살 둘째의 좋은 컨디션 때문에 잠깐 안심했으나 한 달을 보낼 예정이라 엄청난 짐 때문에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지치는 기분이었다. 택시를 탈까 고민하다가 미리 예약해둔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기로 했다. 이 선택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영국을 떠나기 전 가입해 둔 ‘Family Railcard’ 덕분에 저렴하게 기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익스프레스를 타고 패딩턴 스테이션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런던의 세례(?)가 시작되었다.


패딩턴 스테이션에 도착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 덕분에 어쩔수 없이 블랙캡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의 숙소는 템즈강 남부에 있는 배터시 지역이라 블랙캡을 타고 복잡한 런던 시내를 뚫고 숙소로 가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들이 내 마음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소요 시간은 20~30분. 하지만 현실은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택시비도 상상 이상이었다. "엄마, 택시 너무 비싸!" 첫째의 뼈 있는 한마디에 웃음이 나왔다. 맞다, 첫날부터 적응이 필요했다. 그래도 창밖으로 스치는 붉은 벽돌 건물들, 좁은 골목 사이로 펼쳐지는 비 오는 런던의 모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하는 순간, 설렘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런던 한달 살기 숙소를 너무 급박하게 알아본 탓에 당시 숙소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었던 탓에 배터시 지역의 2bd 아파트를 알아봤던 것인데 엘레베이터를 타는 순간 뭔가 잘못된 기분이랄까 ..ㅎㅎ


당장 멈춰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이는 냄새나는 엘레베이터가 우리 가족을 싣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 깔끔한 성격의 남편이 단호하게 외쳤고, 아이들은 그 말에 정중앙에 서서 코를 막았다. 둘째는 "엄마, 냄새 이상해!"라며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나도 속으로는 이 선택이 맞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다행히, 아파트 내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주 깨끗하거나 세련된 곳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크기의 방 두 개와 거실, 수납공간이 넉넉하게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작은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맥주 한 잔 하면 괜찮겠다," 남편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어두운 런던의 밤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상상을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짐을 풀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이제 먹을 것부터 준비해야 했다. 한 달을 살려면 매번 외식을 할 수는 없으니, 장을 봐야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미리 영국의 장보기 서비스를 조사하며 준비해 둔 세일즈버리(Sainsbury's) 딜리버리 서비스가 빛을 발할 때였다. 앱에서 주소를 등록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한국의 쿠팡 프레쉬나 마켓컬리처럼 다음날 아침 배송은 아니지만 아날로그 감성의 영국에서 식료품 딜리버리라니! 새삼 코로나가 많은 걸 바꾸었구나 싶었다.


첫 장보기는 거의 '생존템' 위주였다. 우유, 빵, 시리얼 같은 아이들 아침 식사용 기본 식재료부터 과일, 치즈, 스낵, 여기에 아이들이 고른 초콜릿과 남편이 추천한 영국 맥주도 잊지 않았다. "우리도 한 달 살기라는데, 이 정도는 즐겨야지." 남편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다음 날 아침, 예정된 시간에 맞춰 세일즈버리 딜리버리가 도착했다. 영국에서는 슈퍼마켓 딜리버리가 꽤 일상화되어 있어, 냉장 및 냉동 식품도 문제없이 배송되었다. 아이들은 커다란 쇼핑백에서 자신이 고른 초콜릿과 과자를 찾느라 신이 났다. 냉장고를 가득 채우며, 이 공간에서의 한 달이 조금은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우리 일상은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낡은 엘리베이터도, 조금은 부족한 숙소도 이젠 견딜만했다.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경험들에 조금씩 적응하며, 다음 이야기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런던 여행 꿀팁]


1. 누구나 할인 받을 수 있는 영국 기차 할인, 레일카드


2. 런던의 식료품 딜리버리 서비스



KakaoTalk_20241120_104822749_05.jpg 런던 첫날 - 이런 날씨였는데 순식간에 빗방울이 떨어지던 패딩턴 스테이션
KakaoTalk_20241120_104822749_06.jpg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것 같은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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